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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갓집 화재 … 운명 함께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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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불에 타 잔해만 남은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였던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령 최씨 폄재공파 종가. 작은 사진은 이번 화재로 목숨을 잃은 최씨 12대 종부인 박증순(93)씨.[연합뉴스]

고 최명희(1947~98)씨의 대하소설 '혼불'의 주인공 모델인 종갓집 며느리가 숨졌다.

15일 오전 1시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령 최씨 폄재공파 종가에서 불이 났다. 불은 본채를 태운 뒤 진화됐으나, 이 집에 살고 있던 최씨 12대 종부인 박증순(93)씨가 숨졌다.

최씨 폄재공파는 300년 이상 된 남원 지역의 명문가. 노봉마을 종가는 1905년 지어졌으며, 구한말 양반가를 지키려는 종갓집 며느리 3대의 애환을 그린 작품 '혼불'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이날 숨진 박씨는 '혼불'속에 나오는 효원아씨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청암부인(시할머니)-율촌댁(시어머니)을 잇는 종갓집 며느리로 쓰러져 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박씨는 18세에 전남 보성에서 시집 와 6.25 때 남편을 잃고 1남2녀를 홀로 키우면서 70여년간 종가를 꿋꿋하게 지켜 왔다. 동네 주민들은 박씨가 매일 새벽 4~5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긴 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문을 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남원 혼불문학관 문화해설사인 황영순(58.여)씨는 "박씨는 전형적인 양반집 마님의 기품을 지녔다. 외부 손님이 오면 옷매무새부터 가다듬어 한 치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학식이 풍부해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했다"고 전했다.

자녀들에게는 냉정하리만큼 엄격한 박씨였지만 남에게는 집안의 대소사를 일일이 챙겨줄 정도로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종부였다.

큰딸 최강희(70)씨는 "하인까지 포함해 10명이 넘는 대가족이었지만 한번도 식구끼리만 밥을 먹은 적이 없다. 늘 가난한 이웃과 지나가는 사람까지 불러다 함께 식사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소설가 최명희씨는 외가가 이 동네에 있어 방학 때면 최씨 종가에 자주 들러 박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혼불'을 집필하는 데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박씨의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으며 유족으로는 큰딸 강희씨 외에 둘째딸 영희(68.전 국회의원)씨, 아들 강원(서울대의대 교수.63)씨 등이 있다.

남원=장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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