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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슬픈 스승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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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교사가 된 P의 삶은 즐거워 보였다. 어쩌다 전화를 하면 "수업시간에 애들 눈이 반짝반짝한다"고 기뻐했다. "월급이 옛날 직장의 절반도 안 된다"면서도 "부모도 못 바꾸는 아이들을 교사는 바꿀 수 있다"고 자랑했다.

봄볕이 화사한 15일 오랜만에 P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승의 날 축하한다. 교사 된 게 여전히 즐겁겠지?"하고 물었다. "물론이죠. 얼마 전 애들 데리고 지리산에 생태체험 다녀왔어요. 그놈들만 보면 힘 나죠"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그가 슬그머니 말했다. "형, 저 전교조 탈퇴했어요."

난 적잖이 놀랐다. 전교조가 외치는 '참교육'을 P가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고, 실천하려 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랬어?"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난데없이 수학여행 얘기를 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이나 일본으로 수학여행 가는 학교가 많아요. 비용이 60만~70만원 정도니까 못 가는 아이들이 10~30%나 돼요. 알다시피 교사들 비용은 여행사에서 대는 게 관행이죠. 게다가 교사들은 해외출장비로 70만~80만원을 받게 돼요. 국내로 가면 10만~20만원밖에 못 받고…. 어떤 학교는 교장이 해외로 안 가겠다고 하면 교사들이 막 항의해요. 왜 그런지 아시겠죠?"

P는 돈이 없어 해외여행 못 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공짜 여행을 하는 교사들에게 출장비를 지급하는 교육청에는 화가 난다고 했다. 그는 "정년을 앞둔 원로 교사들이 2~3명씩 해외 수학여행단에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고 씁쓸하게 덧붙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P가 다시 말했다. "교사를 몇 년 하니 나쁜 것도 많이 보이네요. 예를 들면 특정 참고서를 채택해주는 대가로 출판사로부터 리베이트(뒷돈)를 받는 관행 같은 거 말이죠."

P는 몇 년 사이 많이 실망한 것 같았다. 그게 마음 아팠다. 하지만 전교조는 왜 탈퇴했단 말인가.

"전교조요? 형, 제가 말한 사례들은 다 전교조 교사들이 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전교조 동료들에게 여러 번 얘기했지만 먹혀들지 않아요. 전교조 9만 명 조합원 중 20~30%만이라도 참교육을 생각한다면 아마 달라졌겠죠. 지금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얼마든지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할 수 있는데, 만날 입으로만 참교육… 정말 공허해요. 그래서 탈퇴했어요. 더 이상의 위선이 싫어서."

P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P에게 전화한 걸 후회했다. '스승의 날' 듣고 싶었던 건 정말 이런 얘기가 아니었다.

많이 망설였지만 나는 후배 P의 얘기를 칼럼에 쓰기로 했다. 교사들을 욕보이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덮어 두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 교육부가 됐든 전교조가 됐든 나는 P의 얘기를 새겨 들어야 할 사람이 많다고 본다.

누구나 마음속에 한두 분의 선생님을 간직하고 평생을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우리집 가훈은 '할 바에는 잘하자'이다. 좀 촌스럽다. 하지만 고3 때 우리 반 급훈이었다. 킥킥대는 아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급훈을 내거시던 이승립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분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살았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의미가 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정치인도, 예술가도, 과학자도 그렇게 살기 어렵다. 선생님들은 가능하다. '스승의 날'인 15일 촌지 논란 때문에 절반쯤 되는 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런 아픔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