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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실장님의 깜짝 출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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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고르기, 그거 쉽지 않네

지난 16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1층 액세서리 매장 앞에서 작은 승강이가 벌어졌다.

"박팀장한텐 아무래도 명함 지갑이 어울리지 않겠어. 그렇게 하자."

"그래도 마음먹고 준비하는 선물인테, 시계가 더 나아요."

"어허 이 사람, 명함 지갑이 괜찮다니까."

10여분째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두 사람. 그래픽디자인 회사인 캐빈컴의 이동희(37) 실장과 고수연(35) 실장이다. 부부이자 회사를 함께 꾸려가는 파트너인 두 사람은 연말을 앞두고 모처럼 짬을 내 쇼핑길에 나섰다. 직원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한 나들이다.

선물 종류는 대강 정해놓았지만, 막상 매장에 깔린 다양한 상품을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이러지 말고 빨리 고릅시다. 직원들은 지금 일이 몰려 벌써 며칠째 밤샘이잖아. 우리도 마찬가지고."

남편 이씨의 말에 고실장도 마음이 급해진다. 회사 식구라곤 이실장을 포함해 열네명에 불과한, 결코 크지 않은 회사. 야근과 주말근무를 밥먹듯 하는 고마운 직원들. 연말 성과급 외에 뭔가를 더 해주지 않고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왔다.

"이건 수연씨 주고, 이건 아무래도 이번에 들어온 수습사원에게 어울릴 것 같은데."

직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떠올리며 매장을 오르내리길 세시간여. 어느새 다리도 풀리고 전날 사무실에서 거의 밤을 새운 탓에 눈도 스르르 감긴다. 그래도 양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든 부부의 얼굴엔 따스한 웃음이 번진다.

◇ 선물 이상의 감동을 양념으로 준비하다

남편 이씨는 또 다른 '빅 이벤트'를 준비했다. 부인 고실장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깜짝쇼.

바로 산타 복장으로 사무실에 나타나 직원들에게 선물을 돌린다는 극비 프로젝트다.

이실장은 이곳저곳 수소문해 산타클로스 의상 전문 업체인 '러브 산타(www.lovesanta.co.kr)'에서 산타 복장을 빌렸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답게 20대엔 나름대로 끼가 넘친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던 그다. 그러나 어느새 30대 후반에 들어선 데다 한 회사의 대표가 된 그에게 아무래도 오늘 산타 복장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들 녀석 위해서도 이런 쇼는 안 했는데…."

잠시 머뭇거리는 이실장. 그러나 이왕 뽑아든 칼이다.

숙소 겸 휴게실로 쓰는 사무실 3층 룸의 화장실 거울을 보며 독한 표정을 한번 지어보이더니 옷을 갈아입고 수염도 붙였다. 준비 끝.

출입문에 들어서자 "아니 실장님, 그게 뭐예요. 다들 이리좀 와봐."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이실장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린다. 며칠째 밤을 새워 푸석푸석해진 얼굴들에 금방 생기가 돈다.

"와 이 산타 신발 좀 봐." "부러우면 한번 신어보게 해줄게."

이실장은 쏟아지는 직원들의 농담을 받아주면서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활짝 풀어젖힌다.

"이건 지상씨 것, 또 이건 지연씨 것."

패션시계를 선물받은 디자이너 김주상씨가 갑자기 이실장의 목을 와락 껴안는다.

"아싸, 정말 감사해요. 제가 시계 없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야야, 징그럽다."

기획팀의 송은진(29) 대리는 검은색 폴라 스웨터를 건네받았다.

"원래 블랙 컬러를 좋아하는데 혹시 누구한테 미리 물어보시기라도 했나요."

그러자 함께 선물을 고른 고실장이 나선다. "워낙 패션 감각이 뛰어나 평소에 눈여겨봐 뒀지."

몇주 전에 갓 들어온 인턴사원 유지연씨는 "포장 리본이 너무 예뻐 풀기 싫다"며 좀처럼 선물 꺼내기를 주저한다. 연말이라 한꺼번에 일이 몰린 탓에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인 자리. 한바탕 유쾌한 선물 증정식이 끝나자 따뜻한 얘기가 오간다.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선물 받은 것보다 더 즐겁고 행복해요." "선물도 고맙지만, 저희를 생각해주는 마음씨에 더 감동받았어요."

"자, 이제 시간도 얼마 없는데 다시 일들 합시다."

하나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는 직원들.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좁다란 사무실 곳곳이 어느새 포근한 사랑과 행복감으로 채워진다.

글=표재용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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