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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조폭 의리는 구식, 돈 냄새가 좋아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의리나 정보다는 돈의 흐름을 쫓아 움직인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 1월 발표한 ‘조직폭력 범죄 실태 조사연구’에서 드러난 신세대 조폭의 특징이다. 이들은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돈 되는 곳에는 조폭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청부폭력이나 철거용역 등 몸으로 때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시대는 지나갔다.

27년 동안 조폭 검거에 매달려온 서울 송파경찰서 안흥진(57) 경위는 “요즘 조폭들은 유통업ㆍ건설업ㆍ사채업ㆍ컨설팅 등 합법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해 거기서 벌어들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직의 규모를 확대하는 ‘기업형 조폭’이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주식에 투자하거나 벤처기업을 설립해 ‘사장님’ ‘회장님’을 새긴 명함을 갖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조폭 하면 계파 간의 ‘전쟁’을 연상하지만 최근 대규모 ‘전쟁’은 자취를 감췄다. ‘전쟁’을 통한 세력의 확대도 중요하지만 자칫 조직을 노출시켜 공멸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예전에 조직의 운용자금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애용되던 마약 거래도 이제는 인기가 시들해졌다. 수입에 비해 위험하기 때문이다.
현재 검찰ㆍ경찰이 관리하는 전국의 조폭은 327개 파, 8600여 명. 대부분 조직원이 10명 안팎의 소규모로 많아야 25명 선이다. 이들은 위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인력 품앗이’를 하거나 ‘아르바이트 어깨’들을 고용한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효율과 경제성을 우선적으로 따진다.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는지 시곗바늘을 30년 전으로 돌려보자.

1975년 1월 2일 저녁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1층 커피숍.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 야구방망이ㆍ생선회칼 등을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커피숍에는 주먹계 원로들과 서울 중심가를 장악하던 ‘신상사파’ 조직원들이 신년회를 하고 있었다. 60년대 중반 주먹계를 평정한 신상사파를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와해시킨 이들은 범호남파 행동대장 조양은 등 4명의 특공대였다. 주류 공급권과 정기 상납금 등 이권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안흥진 경위는 “김두한ㆍ이정재ㆍ이화룡 등 1세대 주먹의 뒤를 이은 신상사파가 붕괴됨으로써 범호남파 조폭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올라서게 되는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또 이 사건으로 후배가 선배를 공격하지 않고,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던 주먹 세계의 법칙이 무너졌다. 주먹 대신 회칼이 조직 간 ‘전쟁’에 등장한 것도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범호남파는 그 뒤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의 ‘서방파’, 그리고 이동재의 ‘OB파’로 갈라진다. ‘주먹’ 대신 ‘조폭’이라는 간판을 달게 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3강이 지배하던 조폭 세계는 77년 10월 ‘서방파’의 보스 김태촌이 구속된 뒤 78년 11월 양은이파가 다른 세력을 규합하면서 강자로 떠오른다.
폭력조직의 이권 추구 방식과 활동영역이 이 무렵 바뀌기 시작한다. 특정 상권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활동하던 것에서 탈피해 대형 유흥업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권력과 폭력조직의 유착현상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76년 벌어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사건’이다. 김태촌 등이 부하들을 각목으로 무장시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80년 5공화국 초기에는 폭력배 일제 소탕과 삼청교육대 강제 입소로 폭력조직도 잠시 숨을 죽였다. 그러나 경제 호황에 힘입어 향락산업이 발전하면서 조폭도 함께 성장했다.
유흥업소나 상권이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겨가면서 지방 조직까지 강남으로 진출해 조직들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위 조폭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러던 중 86년 8월 중순 발생한 ‘서진 룸살롱 사건’이 발생했다. 조양은의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맘보파가 단합대회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호남 출신 ‘서진파’가 서울 강남 역삼동의 ‘서진 룸살롱’을 습격, 맘보파 조직원 4명을 난자했다.

이권과 영역다툼을 놓고 조직의 사활을 건 전면전이 많았고 수법도 무자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80년대 후반 수백 명의 조직원과 수십억원대의 현금 동원력을 가진 거대 조폭이 나타났다. 이들은 합법을 가장한 사업체를 경영하고 사회단체의 간부를 맡으면서 지역의 유지로 행세한다. 음지에서 벗어나 제도권으로 진출하던 시기였다.

폭력조직이 발호하자 정부는 90년 10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폭력조직의 두목 200여 명을 구속했다. 대검찰청 조승식 형사부장은 “90년대 후반 들어 조폭들이 더욱 치밀하고 교묘해졌다. 조폭과 경제사범을 구별하기 힘든 경우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2000년 이후 조폭들은 소규모ㆍ전문화 등의 방법으로 조직의 효율을 꾀하고 있다. 안흥진 경위는 “한 계파당 조직원이 보통 7∼8명으로 조직 관리 비용이 적게 들 뿐 아니라 기동성이 높아지는 이점이 있다”며 “휴대전화 등 통신수단이 발달한 데다 자금력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다른 조직원들에게 연락해 100명 이상을 동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조직원들은 사채업 담당, 유흥업소 담당, 상가분양 담당 등으로 역할을 분담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지방은 서울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여전히 규모가 큰 토착 조폭들이 이권을 틀어쥐고 지역경제의 어두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부산의 칠성파, 광주의 국제PJ파, 전주의 월드컵파, 청주의 파라다이스파 등은 40∼60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최근 조폭의 또 다른 추세는 ‘세계화’다. 일본 야쿠자 ‘가네야마’는 부산 칠성파와 연계해 부산 일대에서 부동산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 서방파 계열의 조직과 보성파 등은 홍콩과 마카오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폭력조직과 손잡고 도박자금 회수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수사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경찰대 이웅혁 교수는 “조폭은 사회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며 진화하고 있는데 수사관행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수사당국은 과학적 정보 수집을 통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제도권 내에 들어온 조폭 조직을 치밀하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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