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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무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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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영화 위기론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의 정윤철 감독이 한 영화 잡지에 기고문을 실었다. '한국은 할리우드 영화들의 안락한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격앙된 제목이다.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흥행 실패부터 거론했다. "노장 감독의 인생을 함축한 완성도 높은 영화가 철저하게 외면받는 것을, 또 외면받게 하는 구조를 보았다. 과연 그것은 감독이 최소한 제 정신과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구조인가? 단순히 10~20대를 위한 서비스업에 불과한, 변화하는 트렌드에 숨가쁘게 적응하며 제 자신을 팔아먹지 않으면 안 되는 자본주의의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즉각적 흥행이 없으면 무조건 영화를 내리는 풍토를 비판한 말이다. 제작자.작가.투자 배급사.극장.감독 모두의 변화를 촉구한 그는 관객에게는 "극장에서 영화만 보고 나오기, 콜라와 팝콘 사 먹지 않기 운동을 펴자"고 제안했다. "극장 수익의 40%가 매점에서 나오는 상황에서, 영화란 극장 공간을 유지시키기 위해 돌리는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단언이다.

한국 영화를 살리기 위해 극장에서 팝콘을 사 먹지 말자는 그의 말은 현재 영화계의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천편일률적인 '팝콘 무비'를 거부하자는 뜻이기도 하다. 팝콘 무비란 보통 휴가철에 쏟아지는 블록버스터들을 말한다. 팝콘을 먹으며 보면 딱 좋을 킬링 타임용 영화다. 문제는 이런 팝콘 무비가 1년 내내 스크린을 장악하며 다른 영화들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극장이 멀티플렉스로 표준화되듯 영화 또한 팝콘 무비로 표준화, 하향 평준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예외도 있지만, 유수한 영화제에서 각광받은 거장의 작품들이 극장에서 찬밥 신세인 것을 세계 도처에서 발견한다. 영화제 수상이 홍보에 도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케터들도 있다. 평론가가 칭찬할수록 골치 아프니 제친다는 관객도 많다.

결국 문제는 관객이다. 다양한 영화를 원하고 소비하는 관객이 있어야 다양한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영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관객에게 다양한 취향과 입맛을 들이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박찬욱 감독의 '관객론'이 흥미롭다. "그러나 관객을 문제 삼는 건 '왜 우리나라엔 지하자원이 없느냐'는 질문하고 똑같다. 우리가 관객에게 맞춰야지 관객에게 우리한테 맞추라곤 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영화는 다양한 관객 개발이라는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