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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안되면 되게 하라”|경부고속도 건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이에 비해 정주영씨의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대통령의 구미에 쏙 들었다. 선우연 전 청와대비서관(63)이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
『71년 통일로를 닦을 때였을 겁니다. 어느 날 저녁때 박대통령께서 태완선 건설부장관, 정주영 사장과 함께 청와대본관으로 들어오다 마침 퇴근하려던 저와 맞닥뜨렸어요. 인사를 드리니까 「같이 식사나 하지」라고 권해 자리에 끼게 되었지요. 건설부는 공사를 앞두고 예산이 없어 고민 중이었나 봅니다. 태장관이 예비비라도 타내려 했던지 「각하, 돈이 워낙 모자라서…」라고 얘기를 꺼냈어요. 그 순간 정주영씨가 갑자기 태장관의 말을 가로막으며 「각하, 괜찮습니다」라는 것이었어요. 「각하의 필생사업인데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공사비가 올해 안되면 내년에 주시든 가, 아니면 내후년도 괜찮습니다. 정 어려우면 안 주셔도 됩니다」-이러는 거예요. 야, 참 배짱이 대단하구나, 통 크게 장사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안경모씨를 단장으로 기획반 (반장 최종성)·기술반 (허필은)·재경반 (정문도)등 3개 반으로 나뉘었던 건설 계획단은 밤낮으로 공사계획을 세우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계획조사단은 사업 양에 따라 건설비를 산출한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자금규모에 맞춰서 사업계획을 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나름대로 결심한 3백억 원에 예비비 10%를 가산한 3백30억 원 규모로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할 계획을 세우도록 사전에 지시했던 것이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
상식에 훨씬 어긋나는 예산으로 시작된 공사였다. 착공시기가 한겨울이었다는 점에서도 정상이 아니었다. 건설경험도, 기술도 없었다.

<대통령 마음 쏙 들어>
강추위 속에 아스팔트를 깐다고 볏단을 노면에 널어놓고 기름을 뿌린 뒤 불을 질러 땅을 녹였다. 보일러·버너·연탄난로·가마니 등 온갖 기상천외한 신 장비(?)들이 동원됐다.
국민소득 3백 달러 시대에 고속도로건설은 누가 보아도 미친 짓 아니면 정치적인 쇼라고 생각할 만 했다.
『한쪽에서 설계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곧바로 시공해 나가는 식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밀어붙일 수 있었나 봅니다. 공기에 쫓기고 예산은 없고 하니까 모래나 자갈을 넣을 곳에 맨 흙도 집어넣고, 열 번 다질 곳도 다섯 번 정도만 다지고… 아스팔트는 얇게 할 수밖에 없었지요. 개통 후 도로 곳곳에서 하도 펑크가 나 고생한 보람을 찾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더 들더군요.』
당시 육군공병장교(소령)로 공사에 참여했던 방동식씨(62·현 고속도로 보수공단사장)는 『네가 만든 것이니 네가 책임지라는 뜻에서 지금의 직장(도로보수공단)이 주어진 것 같다』는 농담을 곁들이며 당시를 회고했다.
5천년의 정적에 길들었던 국토를 4백28㎞에 걸쳐 푹 내리 가르는 공사였던 만큼 온갖 미신 내지 전통신앙과의 싸움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수원구간 공사에서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를 폭탄으로 폭파시켰다가 동네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게다가 며칠 후에는 공병장교 한 명이 작업 중 불도저에 깔려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 한동안 공사장 분위기가 흉흉했다.
김천 구간 산 속에서는 불도저 작업 중이던 인부 앞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 산은 내 집인데 이사갈 때까지 며칠만 기다려다오』라고 점잖게 청탁(?)을 하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인부가 그 길로 달아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달아난 인부 대신해병대출신 기사가 나서서 불도저로 밀어붙이자 흙 속에서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동강난 채 발견됐고, 이 기사는 그후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68년 12월 21일 서울∼수원 구간이 개통됐다. 서울∼인천간 고속도로도 이날 함께 개통돼 대통령의 기쁨은 매우 컸다.

<「백발노인」의 부탁>
『개통식 다음날 박대통령께서는 건설에 참여한 관계자들을 불러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나를 포함해 건설초기부터 몸담았던 몇 명은 훈장을 받았어요. 대통령은 무척 흐뭇해했습니다. 참석자중 ROTC감독장교들은 전원이 총각이었는데, 박대통령은 그들에게 다가가 파티에 동석한 큰따님 근혜양(당시 서강대 재학 중)을 가리키며 「내 딸 어때?」라고 조크를 건네더군요.』 (윤영호 예비역준장·66·현 신영기술 개발회장)
한 구간 한 구간씩 개통되면서 건설계획 자체를 불신하는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반대로 『하면 된다』는 외침은 높아져만 갔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6월28일 최대의 난공사 구간이던 당재 터널이 많은 희생자를 낸 끝에 관통됨으로써 완공됐다. 70년 7월7일 개통식이 거행됐다.
비록 야당의원들로부터 『경부고속도로를 세워놓으면 몇 초 못 버티고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을 정도로 개통직후부터 오늘날까지 땜질하느라 영일이 없기는 하지만 나라의 산업화와 국민적 자신감을 고양하는데 기여가 대단히 컸다.
김정렴 전 실장은 『박대통령이 「선 개통 후 보완」의 원칙을 세워 그 당시의 형편 껏 공사를 단행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나라는 70년대 말까지도 경부고속도로 하나만 준공시키는데도 급급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사당시 일선 핵심부서인 건설부도로국장을 지낸 윤상옥씨(68·전 도로공사부사장) 같은 이느 『왜 박대통령이 그토록 무리한 공사를 다급히 끝내려 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다.

<개통 초부터 「땜질」>
공기를 2∼3년 늘리면 더욱 안전하게 튼튼한 도로를 만들 수 있었다』며 『매사를 군사작전 수행하듯 하는 몸에 밴 군대식 사고방식 때문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윤씨의 지적처럼 군사문화가 강하게 스며든 박대통령 시대의 경제개발방식은 점차 역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지 불과 넉 달 뒤, 서울 청계천의 평화시장에서는 22세의 재단사 전태일씨가 튼『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 자살했다. 이듬해 8월 경기도 광주단지에서는 3만여 주민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쭉쭉 뻗은 고속도로와 함께 외견상 밝고 희망차게 시작된 박정희의 70년대는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도 점점 짙어만 가던 역사의 대 격변기였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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