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등의 불” 고령화 사회/정영수 특집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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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가족이 포크나 나이프를 들고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눈앞에 놓인 접시엔 아무 것도 없다. 먹음직스런 메뉴가 곧 준비될 것이다. 오늘의 만찬 요리감은 정년을 마치고 귀가하는 가장이다.」
정년문제의 심각성을 섬뜩하게 그린 외지의 풍자만화가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교훈
50여년동안 교단을 지켜온 교장선생님이 퇴직한뒤 가락시장 주차안내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해서 그토록 떠들썩한 뉴스거리가 된다면 「정년이후」의 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떳떳한 제2의 인생을 출발한다」는 교장선생님에게 겉으로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 조심스러운 두가지 우려를 금치못하는,바로 그것이 뉴스가 되어 입에 오르내리게 하는 우리네 정서가 아닐까 싶다. 그 하나는 교장선생님과 주차안내원이 걸맞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의 성격이 마주보이는데라곤 하나도 없다. 교단에서 시장바닥으로 훌훌 털고 나선다는게 웬만한 용기로 될법한 얘기냐는 것이다. 수많은 제자들도 눈에 밟혔을 것이다. 또 하나 자식들은 오죽했겠느냐는 부질없는 남의 걱정이다.
『글쎄 할일 없으면 노인정에나 나가셔서 장기·바둑이나 두실 일이지 원…,저희들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라는 며느리의 타박이었다. 아파트 집보기에 지겨웠던 할아버지가 짬짬이 택시 스페어운전기사로 무료를 달래다 하필이면 시누이눈(드라마 기법상)에 발각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TV나 소설에 얼마든지 등장하는 해프닝이다.
그러나 가락시장의 경우는 달랐다. 정작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까지도 우리들의 우려를 기우로 돌렸다. 우리시대의 고령화사회문제는 이렇게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돈 보다 일자리일까”
통계청 자료에서 추정치를 내보면 2001년 우리나라 60세이상 인구는 7명중 1명꼴이 된다.
출산은 기피하고 사망률은 해마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모여 앉으면 70노인이 한두사람쯤 낀다는 얘기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일단 하나의 소망은 이뤄진 셈이다. 이제 어떻게 오래 사느냐가 문제다.
앙케트를 돌려보면 돈보다 일자리가 아쉬운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통계를 보자. 자식을 둔 부모들이 악착같이 모아둔 돈의 지출용도를 보면(91년 저축추진중앙위) 자녀교육비,아들 딸 혼수,그리고 마지막이 자신들의 노후대책자금이다. 우리나라 관광지에는 왜 미·일·서구처럼 한가롭게 나들이하는 「로맨스 그레이」가 없는가를 금방 알 수 있다. 「평생 자식에 얽매여」 유람관광이라니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어엿한 직장갖고 장가들어 맞벌이로 돈버는 아들에게 몰래 용돈을 쥐어주는 「엄마」가 있단다. 며느리가 주는 용돈이 빠듯해 행여 점심이라도 부실하게 때울까 애처로워서란다. 적어도 이쯤되면 달리 처방이 있을까.
고령화사회는 「함께사는 사회」여야 한다. 일정한 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내보내진 자식에게는 스스로 벌어 독립할 수 있는 정신적인 유산을 그 자식의 몫으로 확실하게 남겨줘야 한다.
○시대 맞는 의식전환을
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의 여론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견해」는 자식을 둔 여자(65%)가 남자(57%) 보다 많았고 50세이상의 높은 연령층(88%)에서는 압도적이었다. 이에 반해 20대 초반에서는 「희생을 해야한다」는 반응이 37%,「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 48%로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가 우세해 묘한 아이러니를 이룬다.
제도보다 의식의 문제가 한발 앞선다. 시대에 걸맞은 정서와 의식의 차원에서 고령화사회 문제를 하나 둘 풀어 나가면 연령적인 「정년」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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