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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의 남용|최상묵 <서울대 치과병원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어린 시절 배가 아프거나 배탈이 났을 때 『엄마 손은 약손, 쓱쓱 내려가라…』하시면서 어머니가 배를 슬슬 쓰다듬으면 신기하게도 아픈 배가 감쪽같이 나아버린 경험이 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배탈이 나면 그 어머니 손길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배를 차게 해서 배탈이 났고, 또 어머니의 손이 따뜻하고 사랑과 정성이 있었기에 그 배아픔이 가셔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성인이 된 후에도 가끔 배탈이 나거나 속이 불편해지면 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있으면 금방 좋아지는 듯한 느낌을 갖곤 한다.
주거를 아파트로 옮긴 후 이런 묘방을 시행할 따끈한 아랫목이 없어 여간 섭섭하지 않다. 결국은 약국으로 달려가 약을 몇 봉지 사들고 와 먹게된다. 약 먹는 시간을 놓칠세라 아내나 아이들이 『아빠, 약 잡수실 시간이야』하고 챙겨준다. 『당신은 의사이면서 약 먹는 시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세요』하는 핀잔을 방기 일쑤다. 사실은 약 먹는 시간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 되도록 약을 먹지 않고 버텨보려는 나의 숨은 의도가 다분히 숨져져 있다.
병이 나면 의사를 찾고 꼭 약을 먹어야 병이 낫는다는, 지극히 공식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요즈음 사람들은 아이들 배를 한번쯤 손으로 쓰다듬거나 아랫목에 뉘어볼 여유도 없이 약국을 찾거나 아이들을 들쳐업고 법원으로 나선다. 가벼운 감기·몸살 정도에도 생각 없이 약이나 의사를 찾아 허둥거리는 현대인들은 침착한 극기로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 같은 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질병은 반드시 약에 의해서만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는 사람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저항력이 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약의 효력을 강조하는 의사보다 약을 먹지 않고도, 아니면 될수록 약을 적게 먹이면서 치료해 보려는 우둔한 의사(?)가 있다면 오히려 그 쪽이 더 믿음직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약의 홍수 속에서 약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인 필자가 배탈이 나면 약을 먹는 것보다 어머니의 손길에 향수를 느끼는 것은 약의 효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너무 남용되고 있는 약의 공해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본능적인 충동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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