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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사회」를 사는 지혜(정년을 이긴다: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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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퇴직 앞둔 50대/생계·자녀 뒷바라지 “막막”/재취업 희망자 63%가 “돈 때문에”/정년전후 혼사 등 목돈 쓸일 집중/상당수가 “발병”… 정신병원 입원도
『정말 도둑질이라도 하고 싶다.』 방범원 윤병완씨(50)는 3년 후쯤이면 닥쳐올 정년을 생각할 때마다 이같은 충동을 느낀다.
깊은 밤 깜깜한 순찰길 만큼이나 막막한 생계대책­40만원도 못되는 월급. 어린 세 딸 성희(16)·경희(14)·승희(5)의 교육비. 1천2백만원의 빚. 이런 것들이 윤씨의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다.
윤씨는 정년을 「사형선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74년부터 18년간 성실히 방범원 생활을 해왔지만 남은 것 없이 곧 「밥줄」이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그렇게 원망스러을 수가 없다.
○은퇴잊고 출근소동
정년을 앞둔 윤씨의 이같은 갈등은 유난한 것이 못된다. 고려병원 이시형원장(신경정신과)은 최근 고령화 추세와 함께 정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노인(정년전후의 연령층)이 예상외로 늘고있다고 밝힌다.
『많은 정년퇴직자들이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돈과 직위·건강·시간 이 모든 것을 정년으로 잃고마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입니다.』
이른바 정년우울증·정년불안증은 물론 심할 경우 정년 정신착란증세까지 보이는 정년퇴직자도 간혹 목격한다는 이 원장은 지난 3월 금융계를 은퇴한 김모씨(58)의 우울증 예를 들었다. 김씨는 은퇴한 다음날 아침도 평소처럼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고 출근(?) 하려다가 부인으로부터 『이제 회사에 나갈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횡설수설 하다 응급실로 실려왔다. 평소 업무에만 전념하는 스타일의 김씨는 은퇴하면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하고 별다른 준비 없이 생활해오다 막상 은퇴명령(?)을 받자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다.
정년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극단적인 예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까지 한 중급규모 회사에서 이사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정모씨(59)는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후 식사를 계속 거부하고 말없이 멍한 상태로 누워만 있다 자식들에 의해 정신과병원에 실려왔다. 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이근덕씨는 『정씨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일에서 찾는 타입인데다 식구들에 대해 유달리 책임감이 강해 자신이 은퇴한후 돈만 까먹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왜 우리의 중노인들에게 정년은 이렇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가.
○60세까진 연금없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가옥연구위원은 그 근본적인 원인을 ▲가계비 구성의 문제 ▲노후 복지제도의 미비 ▲정년퇴직자의 재취업대책 결여로 분석했다. 남자의 수입에 가계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편 가장의 정년퇴직기인 55∼60세에 자녀를 결혼시키거나 대학에 보내야 하는 우리의 생활습관이 정년퇴직자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고령화추세(평균수명 71.3세)로 정년퇴직 이후에도 부부가 15년이 넘는 세월을 수입없이 버텨야 하는 현실이 정년퇴직자를 크게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예컨대 1남1녀를 둔 부부가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있어 목돈을 지출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정년퇴직자가 받는 고통을 수치로 짐작할 수 있다. 25평 주택자금 7천5백만원(신도시 기준),유치원∼대학자녀교육비 4천만원(92년 한국교육개발원),결혼자금 아들 7백50만원·딸 1천50만원(91년 저축추진중앙회),노후생활자금 7천6백여만원(부부생활비 35만원,퇴직후 18년 생존기준)으로 할때 노후생활 자금과 자녀 결혼자금만 합쳐도 전체 목돈중 절반에 가까운 돈이 정년 이후에 들어간다는 결론이 나온다.
돈이 궁박하다는 정년퇴직자들의 호소는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90년 우리나라를 비롯,일본·태국·미국·영국·이탈리아 등 6개국 노인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실시·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퇴직후 취업을 희망하는 이유로 조사대상 노인 3백68명중 3분의 2에 가까운 63%가 「돈이 필요해서」라고 대답했다. 다음으로는 「일하는게 건강에 좋아서」「일하는게 즐거워서」가 각각 12%를 약간 넘었다. 「돈이 필요해서」 재취업을 원한다고 응답한 노인은 일본 약 38%,미국 24%,덴마크 27%,이탈리아 38%로 우리의 경우 돈이 궁박한 정년퇴직자가 일본이나 서구국가에 비해 두배남짓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같은 조사결과는 노후복지 제도의 허술함도 더불어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후복지제도래야 지난 88년부터 실시된 국민연금 제도가 거의 유일한 형편이다. 그것도 기업의 평균 정년연령 55.2세(88년 경총조사)와 연금지급 개시연령인 60세 사이의 공백으로 정말 돈이 절실히 필요한 약 5년동안 정년퇴직자들은 이렇다할 연금을 못만져 보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
정년후 재취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도 정년퇴직자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있다. 정년퇴직자의 재취업은 경제적 궁박에 대한 공포를 덜어줄뿐더러 퇴직자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유지케 하는데도 필수적이다.
○일거리 주자 병 나아
지방의 한 국민학교장을 끝으로 지난해 정년퇴직한 문모씨(66)의 예는 정년후 재취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씨는 퇴직후 서울의 아들집에 올라와 살면서 갑작스런 복통을 호소했다.
의사의 판정결과는 마음의 갈등이 신체적 이상으로 변화한 이른바 「신체화 증상」이었고 치료책으로 취업을 권고했다. 문씨는 동네 제재소의 관리인으로 취직하고 나서 신체적 이상이 씻은듯 사라졌다. 국립정신병원 노인정신과장 정은기박사는 정년퇴직후 전신 혹은 신체 일부분의 통증,수면장애 등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주면 『백이면 아흔아홉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 88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자금지원으로 동덕여대 김덕성교수팀이 실시한 「55세 정년퇴직이 정신·육체·행동에 끼치는 영향연구」는 정년퇴직자가 받는 갖가지 충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년의 충격에 관한 조사로 지금까지 국내 유일한 이 연구는 55세와 60세에 정년퇴직한 서울시 거주 60∼64세 노인 각각 4백명을 비교조사해 정년의 충격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노인은 모두 화이트칼러 출신으로 생활배경 등이 비슷한 공무원·일반기업체 출신 등이 주를 이루었다.
조사결과(다중회귀 분석 등의 통계처리) 55세에 퇴직했던 노인그룹은 60세 퇴직그룹에 비해 자기만족도가 크게 떨어지고 훨씬 더 권위적이며 급·만성 질병 역시 뚜렷이 많이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60세 퇴직그룹은 더 많은 삶의 여가를 즐기며 앞으로 좀더 나은 생활을 할 것이라고 낙천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연금 등을 포함한 연평균 수입에서도 60세 퇴직그룹이 2백86만원으로 55세 퇴직그룹의 2백51만원보다 의미있게(통계학적으로)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연구결과는 현재 평균 정년연령이 55.4세인 우리나라에서 정년충격을 받고 있는 퇴직자가 많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특별취재반
특집부
방인철차장
고혜련기자
배유현〃
김창엽〃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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