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사회변동』심포지엄|중앙일보사 한국사회학회|남-반공·북-「주체」체제로|『이데올로기에 미친 영향』 <김동춘·서울대 박사수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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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해방 후 한국의 반공주의는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탄압논리로서 형성·전파됐던 반공·반소론에 그 근거를 두고있으며 미군정의 점령으로 부활됐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한민당으로 결집한 친일지주·엘리트세력이 반공의 계급적 기반을 이루게 되고 권력장악을 위해 미군정의 반공정책에 편승한 이승만은 이에 협력한다.
45년 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계기로 반공·친공의 대립관계가 강화된다. 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기반은 더욱 확대된다.
그것은 조선공산당의 좌경주의·모험주의 적 노선, 미숙한 공산주의자들의 실전적 오류, 북한의 점령정책상 문제점 등을 기반으로 하여 다수의 중간층·지식인도 공산주의에 대한 중립적인 자세로부터 이탈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공이데올로기는 동서 양 진영간의 모순,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고착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이라는 해방 후 남한의 객관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며 한국전쟁이 그것을 완성했다.
특히 전쟁 후의 정신병적 반공주의는 바로 보수적이고 친일 경력을 가진 인사들이 민족형성과 국가건설에 참여해야 했던 현실적 모순과 불편하고 불안한 심기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극히 험악한 공격과 비난을 수반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의 첨예한 갈등, 전쟁상황이 부여한 집단간의 적대감, 전쟁 중 좌익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뺏긴 사람들의 극도의 정신적 긴장과 보복심리 등이 결합해 매우 공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서 훈련되지 않은 소련군의 북한에서의 통치, 지방 좌익들의 보복적인 힘의 행사, 그 과정에서 혈육을 잃는 체험 등이 「모든 공산주의는 무조건 없애야 한다」(멸공)는 일방론으로 발전해나간다.
전쟁이전까지 반공이데올로기는 사실상 의도된 이데올로기였고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었으나 전쟁을 거치면서 적극적인 반공세력이 국민내부에서 형성됐다.
다수의 피해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반공의 이념을 내면화했다기보다는 단지 전쟁체험의 공포 때문에 이데올로기 지배를 용인하였고 지식인 혹은 과거 중도적이거나 좌익적인 성향을 가졌던 사람들은 모든 가치체계에 대한 허무주의·패배주의 때문에 그냥 반공의 논리가 사회적으로 관철되도록 방관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승만 정권기의 반공이데올로기는 다수 국민의 철저한 체험적 반공, 반 북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부르좌의 발달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갖추지 못한 기형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철저한 반미주의자가 된 북한사람이나 사실상 지배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남한사람들은 모두 전쟁의 상처와 좌절, 나아가 분단의 피해자인 셈이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냉전질서가 무너지고 한국의 부르좌가 시민사회내의 실질적 지배세력으로 힘을 갖춰 가는 87년을 계기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존립할 명분은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본래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개인주의-에 대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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