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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상사 왕자표 고무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신발크기를 잴 때 아직도 문수라는 단위를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말이 일본의 길이단위이며 고무신이 일본상인에 의해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정착됐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1916년 첫 수입된 고무신은 고무바닥에 헝겊 옆창을 댄 일본식이었으나 20년대부터 「조선인공장」이 생겨나면서 전체를 고무로 만든 현재 형태로 바뀌었으며 남자용은 가죽신, 여자용은 당혜를 본뜬 것이었다.
해방이후 고무보급창이 있었던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고무신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으나 생고무가 곧 동이 나버려 폐고무를 재생해 써야했고 그 결과 색상도 당초 연갈색에서 자연히 검정색으로 바뀌게 됐다.
국제상사 왕자표 고무신의 경우 양정모씨(전 국제그룹 회장)가 부친이 운영하던 부산 범일동 정미소의 창고에다 기계 한대를 설치,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찍어내기만 해도 팔리는 시절」에도 품질과 신용에 최선을 다했다. 이 때문에 49년 부산지역의 고무신공장이 79개에 달해 공급과잉사태가 벌어지면서 대부분의 공장이 문을 닫을 때에도 왕자표 고무신은 건재할 수 있었고 6·25가 터졌을 때도 훗날 신발업계의 영원한 라이벌이 된 동양고무(현 화승그룹)와 함께 훈련화 군납업체로 지정될 수 있었다. <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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