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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고의 명궁 91세 장석후 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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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73년간 오로지 활만을 쏘아온 한국최고의 궁수 장석후 옹(91·서울 은평구 응암동163의3). 1백세를 바라보는 「망백」의 나이에 그의 허리는 활처럼 휘었으나 활터의 아침공기를 가르는 그의 화살은 예전처럼 매섭다.
궁도인들간에 「국보적 존재」「활 호랑이」등으로 불리는 그는 9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루 30여발을 날리는 「현역」이며 국궁의 바른 길을 가르치는 엄한 사범이기도 하다.
『활은 눈으로 쏘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쏘는 거야.』 그의 눈은 이제 1백45m 떨어져 위치한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을 보진 못하지만 아직 짱짱한 그의 정신력은 쉬지 않고 과녁에 날아가 시원하게 꽂힌다.
자신의 나이보다 20여년은 젊어 보이는 그는 한창때 85발의 화살을 과녁에 연이어 적중시킨 놀라운 기록을 안고있어 궁술인들은 그를 「신화적 존재」로 여기고 있다. 『아마 아직 아무도 나의 기록을 깬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긍지로 그는 궁수의 가난한 외곬인생을 걸어왔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이 된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양조장 집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빈둥대는 아들에게 5장의 활을 사다준 선친 장희진씨의 가르침으로 궁수의 외길에 접어들었다.
명사수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늘 대하면서도 별 관심 없이 화투판을 기웃거렸던 그에게 선친은 5장의 활을 못쓰게될 때까지 쏘아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어서 빨리 망가뜨려 괴로운 짐 보따리를 벗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막무가내로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셋째부터는 활이 뜻대로 망가지지 않았으며 신기하게도 쏘면 쏘는 대로 척척 맞았다.
이때부터 명사수로서의 그의 천부적인 재질은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이에 재미가 들린 그는 지금은 비무장지대가 된 장단면 벌판에 대고 화살을 날리는 「벌토질」을 하루도 쉬지 않고 2년여를 계속했다.
22세 때부터 그의 실력은 전국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북의 청진·함흥·웅기·신포 등 각 지역에서 주최하는 궁도백일장에서 1등상을 모조리 휩쓸어 「신궁」으로 불렸다.
각 대회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사수들이 2백∼3백여명씩 참가해 불꽃튀는 경쟁을 벌였다.
그가 단순한 궁수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궁도인들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게된 것은 국궁의 명맥을 오늘에 이르게 한 그의 숨은 노력 때문이었다.
일본제국이 한국 땅을 강점한 20년대, 그들은 당연히 한국무사의 정신을 이어온 국궁을 이 땅에서 축출하기 위해 당시 전국에 퍼져있던 활터를 모두 문 닫으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그 탓에 전국의 사정은 2∼3년간 소리없이 문을 닫고 전국의 사수들은 한 많은 가슴을 술로 달래야 했다는 것.
당시 조선궁술연구회 회원이었던 그는 이를 참아내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남겨둔 채 활터를 일으키고 국궁의 명맥을 잇기 위해 혼자 7년여 전국을 떠도는 유랑인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그의 숨은 노력으로 활터는 속속 재정비되고 후진들을 양성하는 그의 노력은 열기를 더해갔다. 그후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국궁을 무예가 아닌 스포츠 차원에서 허용하는 것으로 방침을 수정해야 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예부터 중국사람들이 동이족이라고 불렀지. 이는 곧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야. 60년대 초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온 양궁을 국제경기용이라고 해 그것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활의 소재나 쏘는 방법 등이 다른 국궁은 자연 천덕꾸러기가 됐고 설자리가 아주 좁아져 화가 나.』
우리민족과 역사를 같이 해온 제것을 나 몰라라 팽개치고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느냐며 노궁수는 정부차원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65년부터 27년간 서울 사직동에 있는 활터 황학정(조선시대 임금들이 활을 쏘던 정자를 경희궁으로부터 옮겨놓은 것) 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계처럼」 출근하고 있다.
몇년 전 약수터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척추를 다쳐 장 옹의 허리는 그야말로 활의 형상으로 굽어져있지만 활을 쏠 때만은 한치의 허술함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함과 강인함이 온몸을 감싸 「활 호랑이」시절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나이 칠십이 넘을 때까지 각종대회에 나가 젊은이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익장으로 주위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는데 백제문화재 전국궁도대회, 춘향제 전국남녀 궁도대회, 권율 장군 추모제 전국남녀 궁도대회 등에 나가 30여 차례 수상한 경력을 갖고있다. 요즘의 국궁사범들은 그를 「교장님」으로 모시고 있다.
그가 그 동안 배출한 궁도인은 모두 2천명. 현재 우리 나라 국궁인구는 약 1만5천여명인데 이들 대부분이 직·간접으로 장 옹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국궁은 과녁과 나의 싸움이야. 활을 쏘면 겸양지덕이 생기고 자기수양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지. 또 활을 쏠 때는 배에다 힘을 주고 이 힘이 발부리까지 미쳐야하므로 단전호흡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 건강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거든.』 국궁이 가장 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동적인 운동이라고 말하는 그는 『활을 안 쏘면 금방 드러누워 못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며 놓았던 활시위를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요즘은 화살이 나는 방향도. 과녁도 예전처럼 잘 보이지 않아 「감」에 의존해 시위를 당기지만 둘 중 하나를 맞히는 높은 적중률이 아직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후학인 권무석 사범(50) 등의 노력으로 올해 내에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사법)될 이 노궁수는 75년간 해로한 부인 박정순씨(87)와의 슬하에 71세와 48세인 자녀, 7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 <고혜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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