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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말기 꼼짝 않는 게 최고"|지나친 보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정부가 대통령집권말기 권력누수방지를 위해 적극적인 민원행정 쇄신방침을 밝히면서 전 공무원을 상대로 대대적인 사정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터져 나온 징코민사건으로 관계부처직원과 업체간의 「검은 유착」이 수사대상에 오르는 사태까지 벌어져 공무원사회에 「보신비상」이 걸렸다.
정권교체기의 사정뿐만 아니라 청와대·수사기관·감사원·자체감사와 조사 등 항상 「칼날」을 의식해야하는 집단이 공무원이다. 한눈파는 일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공무원들이 대다수지만 곳곳에서 뿌리깊은 부정과 비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침몰하는 것도 또 다른 공무원사회의 이면이다.
그러나 꼭 부정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를 먹고사는 공무원들은 어찌 보면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인 인사권행사를 더 의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공무원사회에서는 보신책도 많고 처세술도 다양하다.
세무공무원인 L씨는 최근 승용차를 구입하면서 소형과 중형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소형으로 결정했다. 자신의 지위로 중형을 굴리다가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시선이지만 「요감시 대상」에 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속세·증여세 등 거액의 「재량」이 작용할 소지가 큰 세무업무를 맡는 공무원들이 일상생활에까지 몸조심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례다.
업무에 따라 오랜 경험으로 금품수수의 말썽이 많아 기피대상이 정해져있는 예도 많다. 일반적으로 「회」자나 「합」자로 끝나는 단체의 돈은 「맹독성」으로 분류돼있다. 이들 단체의 로비자금은 수많은 회원들로부터 거둔 것이기 때문에 반공개된 상태이고 그만큼 말썽이 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법원 행정처는 최근 14대 국회의원선거사범에 대한 재판을 서둘러줄 것을 담당재판관들에게 당부하는 공문을 보냈다. 선거가 끝난 지 세 달이 지나도록 선거사범에 대한 재판은 일반사건과는 달리 지지부진한 상태다. 업무처리를 둘러싼 보신책은 인사 등을 의식해서 생긴 것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인사철이나 정권변동기에는 새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만들어 하면 관련부처나 이해관계자와 얽혀 시끄러워지게 마련이고 결국 자신만 손해라는 사고방식이다.
검찰의 경우 선거 등 미묘한 시기에는 인지·기획수사에 착수하지 않으며 불가피할 경우에는 층층결재로 확실한 면피장치를 확보한다.
특히 잡음이 일 가능성이 있는 사건의 처리는 후임에게 미뤄 사건이 장기화되는 예도 있다.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는 법원의 정치성사건·국회의원사건·선거사범 등의 재판지연도 보신의 기술이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일상생활까지 관찰대상이 돼 보신책의 범위가 넓어진다. 일반적으로 중앙부처의 과장급은 골프장출입이 용인되지 않기 때문에 업무상 골프를 칠 기회가 많은 경제부처 과장들은 사정기관의 체크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골프가방에 가명을 적어놓고 예약도 그 이름으로 하는 것을 생활의 지혜로 삼고있다.
철도청의 일선역장들은 재임기간 중 부하직원들과 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부하직원 등의 음해성투서가 상부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신책의 홍수시대.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의 근본원인을 불안정한 정치권의 영향, 원칙보다 변칙이 더 많은 인사, 뒤떨어진 대우, 직업공무원제 등 제도의 미비 등으로 공직사회가 아직도 제 틀을 잡지 못해 피해의식이 만연해있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이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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