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7. 연덕춘 선생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연덕춘 선생이 한 프로골프대회 개막 식에서 시타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요즘 나이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훈련량이 과거 내 선수 시절에 비하면 너무 적다. 조금만 아파도 훈련을 빠지려고 한다. 또 레슨에만 매달리려는 태도가 보인다. 요즘 프로골퍼 지망생들은 레슨과 개인훈련을 각각 절반쯤 나눠서 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레슨이 10%도 안 됐다. 거의 개인훈련이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스승이자 대선배인 고(故) 연덕춘 선생님으로부터 틈틈이 샷을 배웠다.

이 기회에 연 선생님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그분은 한국골프의 선구자였다. 숱한 '한국 1호'기록을 남겼다. 1916년 서울에서 출생한 선생님은 경성구락부에서 처음 클럽을 잡았고, 본격적인 골프수업을 받기 위해 한국인 최초로 34년 겨울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한 분이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 자격을 따냈다. 물론 한국 프로골퍼 1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연 선생님은 41년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이 역시 한국인 최초였다. 그 우승은 나라 잃은 한민족의 울분을 말끔히 씻어준 값진 낭보였다. 56년 극동오픈골프선수권대회(필리핀.6위)에 참가, 광복 후 한국 골퍼의 해외대회 출전 길을 열었다. 58년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 국내 프로골프대회 첫 챔피언에 올랐다. 아쉬운 점은 골프가 지금처럼 각광받지 못할 때 전성기를 보냈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더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을 게다.

연 선생님은 은퇴 후에도 한국프로골프협회 제2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협회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공헌했다. 한국프로골프협회는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 매년 투어에서 최저타를 기록한 선수에게 '덕춘상'을 시상하고 있다.

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세 번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골프냐. 다시 한번 열심히 해봐라"고 충고해주던 선생님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운동선수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체격이 단단했던 선생님은 2004년 세상을 떠났다.

믿기지 않겠지만 서울컨트리클럽 연습장은 맨땅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연습장에 인조매트가 있지만 당시엔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초창기 골퍼들은 아이언을 잘 친 것 같다.

요즘 같은 봄이면 골프장들은 페어웨이에 모래를 뿌린다.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공을 정확하게 때리지 못하는 골퍼는 뒷땅을 치거나 토핑을 내기 일쑤다. 우리는 그런 샷을 '알공깐다'고 표현했다. 여름이나 가을에는 공이 잔디 위에 떠 있어서 정확히 때리지 못해도 공이 잘 떠서 날아가지만 맨땅에서는 그렇지 않다. 벙커샷을 제외한 골프의 샷은 무조건 공을 먼저 때려야 하는 것이다. 요즘 필드에서 알공을 까는 분은 '내가 공을 먼저 때리지 못하는구나'라고 느껴야 한다. 그러면 스코어가 좋아진다.

한장상 KPGA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