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늑장수사 누구 책임" 경찰 내부 신경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1면

30일 오전 11시에 예정됐던 경찰청 기자간담회가 갑자기 취소됐다. 공교롭게 같은 시각 서울경찰청에서도 기자간담회가 취소됐다. 매주 월요일 열리는 이 간담회는 경찰 지휘부가 기자들과 현안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다. "중간수사 발표가 안 나온 상태에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건을 언급하기 곤란하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요즘 경찰 지휘부 내부에선 김 회장 폭행 사건의 '늑장.부실 수사'의 책임을 놓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경찰청-서울경찰청-남대문경찰서는 요즘 각자의 입장을 해명하기에 바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 '책임 떠넘기기' 공방=이택순 경찰청장은 지난달 29일 미국 방문 뒤 귀국하자마자 경찰청으로 직행했다. 긴급 지휘부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나는 언론 보도 이전 서울경찰청으로부터 보고받은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감찰을 통해 (부실 수사 지적에 대한) 책임자를 가리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이번 사건과 무관하며, 보고를 받지 못해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자리였다는 게 일부의 시각이었다.

이튿날 서울청은 보도자료를 냈다. "김 회장 사건은 사실 확인이 안 된 첩보 수준이라서 이 청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홍영기 서울청장이 한기민 서울청 형사과장에게서 구두로 보고받은 뒤 '사실 여부를 정확히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덧붙였다. 또 "'외압 여부'나 '수사 진행상의 의혹' 부분에 대해선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진상을 밝히겠다"고 했다.

서울청의 지휘를 받는 광역수사대는 남대문경찰서로 사건을 넘긴 이유를 설명했다. 통상 광역수사대는 중대 사건을 수사한다. 김 회장 사건을 첩보로 최초로 인지했으면서도 일선 남대문경찰서로 이첩한 배경이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온 상태다. 광역수사대는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이 돼도 고소.고발이 없기 때문에 사실 확인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또 "대기업 회장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폭행사건이라 광수대가 수사할 사항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부실 수사 논란의 한복판에 서게 된 장희곤 남대문서장도 나섰다. 그는 "지난달 28일 광수대로부터 사건을 이첩받은 뒤 절차에 따라 수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외압 의혹'에 대해선 "한화 고문을 맡고 있는 최기문 전 경찰청장과 단 한 차례 통화한 사실이 있다. 그것도 사건을 이첩받기 전이라 잘 모르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 폭로 경쟁으로 번져=장희곤 서장은 29일 광수대가 보냈다는 첩보 보고서를 전격 공개했다. 첩보 보고서는 좀처럼 언론에 공개된 사례가 없다. 보고서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경호원 6명, 폭력배 25명이 납치.감금.폭행을 저질렀다"고 적혀 있다. 보복폭행 사건 발생 시간과 장소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첩보를 바탕으로 착실히 수사를 진행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첩보가 부실해 수사가 난항을 겪었다"는 서울청 상부의 발언을 뒤집은 격이 돼버렸다.

서울청도 30일 '한화 회장 범죄 첩보 처리 해명'이란 자료를 냈다. 첩보를 어떻게 입수해 어떤 과정으로 처리했는지 등이 소상히 적혀 있다. 서울청은 남대문서의 내사 진행상황을 도표로 정리해 소개했다. 남대문서가 지난달 24일 언론 보도 이전까지 피해자 6명에게서 진술을 확보한 사실을 부각했다. 남대문서 수사에 문제가 있다는 뉘앙스였다.

◆ 청와대 질책에 놀라=이 같은 신경전은 일각에서 일고 있는 인책론의 불똥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다.

수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지난달 27일 강희락 경찰청 차장은 국무총리실에 수사상황을 보고했다 심한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 경찰 보고 내용과 언론 보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청와대 상황점검회의도 경찰 수사가 도마에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말 공직사회 기강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이 해이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 뒤늦게 보고됐고, 국민이 경찰의 수사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지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철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