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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지주’ 럼즈펠드 퇴진 리비 비서실장 기소 결정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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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04면

몸통은 체니 백악관 수뇌부 쪽에서 중앙정보국(CIA) 소속 스파이 신원을 고의로 언론에 흘린 ‘리크 게이트’를 풍자한 만평. 딕 체니 부통령이 이 게이트의 몸통으로 비서실장인 루이스 리비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메시지다. 

2003년 12월 초 워싱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 체니, 영향력 잃다 #한때 케네디 대통령 NSC보다 더 많은 안보보좌관 갖춰…수렁에 빠진 이라크가 발목 잡아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 라인은 2차 6자회담 개최 논의로 분주했다. 회담 개최국 중국이 2차회담에서 발표할 성명 초안을 전달한 직후다. 1차 회담이 열린 지 4개월 만이었다.

지는 체니 딕 체니 부통령(가운데)이 지난해 6월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부시 대통령의 연설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 외교안보 사령탑이던 그의 힘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다. 왼쪽부터 댄 바틀릿 백악관 고문,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 체니, 잭 크라우치 백악관 안보 부보좌관, 스티븐 해들리 안보보좌관. AP특약 

12월 12일. 고위급 회의에 딕 체니 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수개월 동안 북한 관련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그였다. 중국 측 초안은 부시 행정부가 주창해온 북한 핵 해법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해체’(CVID)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완전하고’만 들어있었다. 체니는 ‘돌이킬 수 없는 검증’이 성명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중국 안은 거부됐다. 2차 회담은 해를 넘겨야 했다(워싱턴 포스트).

체니는 지난해 말까지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 외교수장이자 강경파의 대부였다. 공세적 대테러전과 일방주의 외교의 엔진 역할을 했다. 그는 국내 정책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비서실장이던 로런스 윌커선은 “진짜 미국 대통령은 체니”라고 말한다(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이런 부통령은 없었다.

‘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 ‘총리’란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부시 대통령도 자신을 최고경영자(CEO)로, 체니를 사업총괄책임자(COO)로 견주었다. 체니는 워싱턴을 찾은 외국 정상과도 개별 회동을 했다. 2002년 상반기에만 17명의 각국 정상과 만났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등이다. 그는 해외 순방 때도 정상들을 상대한다. 역대 부통령은 외국 국장(國葬) 때나 다른 정상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니의 시대는 가고 있다. 그의 영향력 퇴조에 관한 언론 보도는 쏟아지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월 22일자에서 “대통령과 그의 관계가 약화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가 주도한 대북 교섭 회의론이 재고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전했다. 뉴욕 타임스도 “(체니가 전쟁을 주도한) 이라크 혼란과 맞물린 공화당의 중간선거 패배와 부시 퇴임 전 외교적 홈런에 대한 갈망이 개입정책 옹호론자들에게 여지를 주었다”고 분석했다(2월 2일자).

부시 행정부 1기 때 절정에 달했던 체니의 영향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첫째는 경륜이다. 35세에 제럴드 포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아버지 부시 정권 때는 국방장관을 맡아 걸프전을 치렀고, 하원 정보위원도 역임했다. 그는 2001년 9·11테러 당시 위기관리의 일등공신이다. 대통령을 통신시설이 구비된 공군기지로 대피시킨 것도 그였다. 백악관 비서실장, 차장을 지낸 그는 백악관의 배관공사 문제까지 꿰뚫고 있었다. 정보기관들의 운영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체니는 꼼꼼하다. 로런스 린지 전 국가경제회의(NEC) 국장은 “우리가 그에게 정보로 가득 찬 3인치 두께의 바인더를 건네주어도 그는 하나도 빠짐없이 읽는다”며 “그가 결심하면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이라크전쟁은 체니의 전쟁이기도 했다. 체니는 전쟁 전 수없이 중앙정보국(CIA)을 방문해 이라크의 무기 프로그램 증거를 논의했다. 미국 부통령이 직접 현장을 지휘한 주목할 만한 역할이었다(『불칸집단의 패권 형성사』, 제임스 만). 그러나 이라크가 수렁에 빠지면서 체니의 발목을 잡았다.

럼즈펠드와의 2인3각 행보도 빼놓을 수 없다. 닉슨 행정부에서 경제기획국장을 맡은 럼즈펠드는 28세의 대학원생인 체니를 보좌관으로 채용했다. 체니는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7년 동안 럼즈펠드의 문지기이자 최고관리자였다. 체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럼즈펠드를 볼 때 멋진 국방장관으로 본다. 그러나 그가 나를 볼 때 전 보좌관으로 바라본다.” 두 사람과 모두 친한 한 인사는 “가끔 파티에서 그들을 볼 때 누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Running the world』). 대테러전이 부시 행정부의 시대정신인 상황에서 둘 간 ‘철(鐵)의 결속’을 당해낼 부처는 없었다. 파월의 국무부와 라이스의 NSC는 정책 조정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체니에게 럼즈펠드 퇴진의 구멍은 너무나 크다.

체니의 안보보좌진은 특기할 만하다. 리처드 하스 전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은 “체니 부통령실은 미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조직을 갖췄다”고 말했다. 체니의 안보보좌관은 한때 35명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NSC 보좌관보다 많은 숫자다. 레슬리 젤브 전 미국외교협회 회장은 “체니의 보좌진은 숫자·영역·영향력 면에서 전례가 없고, 모든 이슈와 지역을 맡았다”고 말한다. 보좌진의 핵심은 루이스 리비 전 비서실장이다. 그는 ‘역대 가장 강력한 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2005년 10월 ‘리크 게이트’로 물러날 때까지 부통령 안보보좌관, 대통령 보좌관도 겸직했다. 국방·국무부에도 체니의 사람이 적잖았다. 네오콘인 더글러스 페이스(전 국방부 차관), 존 볼턴(전 국무부 차관·전 유엔대사)이 그들이다. 행정부 안에 거미줄처럼 쳐진 체니 인맥은 정보망이자 지렛대였다. 그러나 이들도 물러났다.

체니는 대통령과 친밀하다.

보수주의적 신념은 둘 간의 접착제다. 체니는 어느 부통령보다 대통령과 많은 시간을 갖는다. 앨 고어 전 부통령은 클린턴 전 대통령과 일주일에 한 번 점심 식사를 했다. 체니는 주 1회 점심 외에 하루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는 대통령과 함께 매일 정보브리핑을 받고, 경제·국내 정책 회의에도 참석한다. 그런데도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9·11테러 대책을 지휘했지만 언론 브리핑은 부시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정치적 야망도 없다. 대통령 자문역이란 한 우물을 팠다. 대테러전 이후 대통령 권한 확대에 앞장선 것도 그였다.

체니가 부시 1기 때의 영향력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부시는 현실주의 외교로 국내외의 비판을 잠재우면서 레임덕을 관리하려 하고 있다. 이 노선은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의 선거전략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는 통치 유산(legacy)을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은 어느 지도자에게도 탐나는 어젠다(agenda)다.

그렇다고 체니가 뒷짐만 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이 이란 견제를 위해 최근 걸프에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은 그가 부시를 설득했기 때문이라는 보도다. 북핵 문제는 미 외교안보 라인 권력게임의 한 변수다. ‘2·13 합의’ 이행이 삐걱거리면 체니 라인은 다시 전면으로 나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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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니는
1974년 포드 대통령 비서실 차장
75년 포드 대통령 비서실장
79년 하원의원
89년 국방장관
93년 미국기업연구소(AEI)
95년 에너지회사 핼리버튼 CEO
2001년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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