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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첫 여성 CEO는 왜 사약을 받았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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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7면

조선의 16대 왕 인조는 왜 맏며느리인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이하 강빈, 1611∼46)를 죽였을까. 잘 알려진 대로 강빈은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8년여 만에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천주교와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개방주의자로 변모했다. 강빈은 청나라에서 무역으로 큰돈을 번 국제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가 되었다.

인조가 강빈에게 사약을 내린 사건을 이른바 ‘강빈옥(姜嬪獄)’이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맏며느리를 죽일 만한 명백한 명분을 찾기 힘들다. 인조는 우선 수라상에 오른 음식에 독약이들었다는 이유로 강빈 쪽 궁녀들을 고문했다. 그 궁녀들은 모두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죽어갔다. 그러자 인조는 강빈이 심양에 있던 시절 역모를 계획했다며 처벌을 명했다.

당시 강빈을 죽이는 데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것이었다. 이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였고,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봉해진 후였으니 더욱 그러했다. 인조는 무리수를 두면서 강빈에게 사약을 내린 셈이다. 인조는 강빈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우선 강빈은 총부였다. 총부란 남편이 먼저 죽은 맏며느리.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 총부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조선의 총부는 남편 사후 제사를 담당했다. 아들이 없을 때는 양자를 들여 제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양자를 들일 때 총부들은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바로 밑 시동생의 아들보다는 10촌 이상의 먼 친족에게서 양자를 들이고자 했다. 한마디로 총부는 가계 계승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다. 따라서 이미 봉림대군이 왕세자가 됐지만 총부이자 원손(소현세자의 맏아들)의 어머니인 강빈은 다시 ‘판’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 당시 신하들 사이에서는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강빈은 또 경제력이 있었다. 청나라는 소현세자 부부에게 생활 방편으로 심양에 농장을 마련해주었다. 강빈은 생산과 무역을 결합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귀국 때 재물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왔다. 예컨대 강빈은 귀국 후 강원도 철원의 한 절에 황금 260냥을 시주했다. 단순 환산해도 지금 돈으로 2억원에 가까운 거액이었다. 이 시줏돈은 강빈이 폐빈이 된 후 회수되어 강원도 재정으로 요긴하게 쓰일 정도였다.

게다가 강빈은 새로운 세상을 본 사람이었다. 강빈은 청나라가 명나라 수도 북경을 ‘접수’할 때 청군과 함께 입성했다. 직접 청의 선진문물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에 눈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소현세자와 강빈에게는 ‘소중화(小中化: 조선이 명을 이어 작은 중국이 된다는 것)’에 연연하는 모습은 없었다. 강빈은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왕실 여성으로서 스스로 경영능력을 습득하고, 주체적으로 타국과 교류한 사람이었다. 명·청 교체라는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정세와 지구 반대편 서양의 흐름을 읽어내면서 조선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인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인조는 강빈을 제거할 때 갖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인조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바로 이 변화의 부분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변화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이 되리란 사실을 인조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이프(If)’(가정)는 무의미하다고들한다. 그럼에도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지 않고 ‘원칙대로’ 왕위를 계승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조선은 과연 좀 더 일찍 서양과 만나고 또 그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워갔을까. 강빈은 숙종 44년(1718) 복권, 즉 신원(伸寃: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음)됐다. 죽은 지 72년 만에 이 여성 개방주의자는 역적의 누명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