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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바람난 CEO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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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0면

사진 신인섭 기자

지난달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열린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에 보기 드문 단체 입장객이 들었다.

국내 유수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20여 명이 좌석을 ‘점령’한 것. 이 음악회에 참석한 경영자들은 3, 4월 두 달 동안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박은성씨에게 클래식을 배우는, 같은 반 학생들이다.

이날 공연에는 현대 작곡가 슈니트케의 피아노 협주곡이 무대에 올랐다. 현대 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정기공연은 일반적으로 청중을 모으기 힘들다. 하지만 표를 직접 사서 입장한 최고경영자들은 이날 공연의 분위기를 바꿔놨다.

대원주택의 김일곤 회장은 “CEO들이 예술가들의 후원세력이 된 것”이라며 “간접적인 관심에서 연주 후원까지 나선다”고 설명했다. 이들 20여 명은 5월 열리는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김선욱의 피아노 협연 공연도 이미 단체로 예약했다. 여기에 관행처럼 공짜로 받는 ‘초대권’은 한 장도 없다. 기업가들이 돈을 내고 공연에 가서 예술가들에게 힘을 주는 건강한 순환의 한 장면이다.

거침없이 따라오는 열기

CEO들은 같은 달 19일 서울 대치동의 소규모 공연장 ‘살롱 드 칼라스’에서 다시 만났다. 이날은 CEO들이 피아노 곡을 배우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CEO 60여 명은 쇼팽의 왈츠가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어떻게 다른지, 마주르카의 리듬과는 얼마나 비슷한지를 직접 들으며 공부했다. 국내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인 신수정ㆍ김대진ㆍ강충모씨가 직접 나서 연주와 해설을 동시에 했다. 김대진씨는 “아주 쉬운 곡으로 시작해 어려운 곡을 설명하는 동안 지치지 않고 따라오는 열기가 느껴졌다”고 이날의 분위기를 전했다.

KT 남중수, 현대오일뱅크 서영태, 호텔 신라 성영목, 금호고속 이원태 사장 등 CEO 60여 명은 이처럼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나 ‘살롱 드 칼라스’에 모인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주최하고 대원문화재단이 후원하는 CEO 대상 클래식 강좌다. 2004년 와인을 시작으로 미술ㆍ사진을 교육한 이 강좌는 올해의 주제를 클래식으로 정했다. 두 달을 주기로 수강자 멤버를 바꾸는 클래식 강좌는 점점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60명 모집에 들지 못한 ‘대기자’ CEO만 200여 명이다.

음악가와 기업가의 ‘윈윈 게임’

이 강좌에서 협주곡 강사로 나선 피아니스트 이경숙씨는 “얼마 전 미국의 ‘포춘’지에서 예술에 관심이 많은 CEO일수록 경영하는 기업의 가치가 높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오늘 강의를 들으신 분들에게 음악과 예술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CEO를 대상으로 한 클래식 강의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이후 이씨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을 샅샅이 해부해 설명했다. “옥타브로 된 이 부분을 가장 잘 치는 사람은 미국의 피아니스트 게리 그라프만이죠. 저도 그분에게 이 테크닉을 열심히 배웠어요”라는 등 곡이 가진 이야기와 거기에 얽힌 연주자의 추억도 덤으로 따라왔다.

지휘자 박은성씨도 브람스의 교향곡 1번 1악장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휘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셨죠. 지휘자 없이 가는 연주를 한 번 들어보세요.” 곧 음악은 엉망진창이 됐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고나서야 각 악기의 맛이 그대로 살아났다.

‘학생’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연주에 집중했다.

복습에 열심인 CEO 학생들은 이달 1일 시작한 ‘2007 교향악축제’의 첫 번째 공연 표도 단체로 샀다.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하는 공연이다. 여기에 참여한 한 CEO는 “수원시향 지휘자에게 배운 브람스 1번을 부천시향의 연주로 들어보며 두 교향악단의 수준을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를 보였다. 음악을 단순히 듣는 수준이 아니라 분석ㆍ이해할 수 있는 내공이 높은 경영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분위기다.

문화계 인사들과의 활발한 교류

CEO들의 클래식 배우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오일뱅크의 서영태 사장은 요즘 성악 배우기에 한창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시간을 내 간단한 독일ㆍ이탈리아 가곡을 마스터할 때까지 배우고 있다. ㈜신승영 실내디자인 연구소의 신승영 대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님에게 성악을 배우는데 함께하는 CEO가 12명 정도 된다”고 소개했다. 금호미술관의 박강자 관장, 대교 베텔스만의 김영관 사장도 성악을 배우는 학생 중 하나다.

클래식 음악은 참석자들을 가깝게 하는 끈이 되기도 한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문훈숙 단장, 정동극장의 최태지 극장장 등 다른 분야의 예술인들도 참여한다. 이들 모두는 함께 브람스ㆍ랄로ㆍ베토벤을 논하면서 한발 가까워졌다.

연주ㆍ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 자리에서 예술가와 기업가는 자유롭게 교류한다.

이 만남의 결과는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원문화재단의 강은경 사무국장은 “각종 예술단체에 발전기금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기업가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가들은 왜 클래식을 배우고 있을까. 삼성경제연구소의 강신장 상무는 “경영자는 모두 판타지 업(業)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예술이 산업화하는 시기를 넘어 이제는 산업이 예술화하고 있다는 것. 그 때문에 기업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 경영자는 소비자ㆍ고객을 ‘유혹’하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고 그 자원은 음악ㆍ미술 뒤의 스토리를 따라가며 저절로 얻는다. 강 상무는 “삼성경제연구소가 CEO에게 공급하는 콘텐트 중 문화의 비중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클래식을 배우는 기업가들은 서양음악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바흐ㆍ하이든ㆍ모차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 뒤에는 항상 음악을 이해하는 후원자가 있었다. 대주교ㆍ정치가ㆍ자본가 등의 후원자들은 작곡가들과 교류하며 지적 만족을 얻었고 음악가들은 이들의 도움으로 역량을 발휘했다.

음악평론가 장일범씨는 “CEO들이 연주자를 한 명이라도 더 접하고 한 곡이라도 더 듣는다면 문화 발전의 씨앗이 이미 심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씨는 “직접 음악을 듣고 배우는 기업가들은 의례적인 후원 대신 진심이 담긴 관심을 음악계에 쏟을 가능성이 크다”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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