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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순례, 나만의 지식 보물 찾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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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07면

서울 용산역 근처 ‘뿌리서점’은 헌책의 흐름이 무척 빠른 곳으로 이름났다. 신인섭 기자

“헌책방에 남을 수 있는 책을 내라.”

좋은 책(良書)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헌책방 주인이 보기에는 헌책방의 헌책이 양서다. 헌책방에는 아무 책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헌책방 책들은 안 팔린다고 해서 출판사로 반품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서점주인의 깊은 안목을 통과한 책들만 헌책방에서 살아남는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들이 먼지 속에서 새 주인을 기다린다.

헌책방은 책의 하수구가 아니라 책의 부활 장소다. 그러니 헌책방에 없는 책들이야말로 모든 독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책, 함량 미달의 책일 가능성이 높다.

누구나 헌책방과 관련된 추억이 있으리라. 청소년 시절 헌책방은 ‘삥땅’의 현장이었다. 부모에게 새 책 값을 받아 헌책을 산 뒤 차액을 탕진했다. 문학청년들은 ‘삼중당문고’를 게걸스럽게 사서 정승처럼 읽었다. 대학 시절엔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려고 헌책을 되팔기도 했을 것이다.

소설가 안정효씨는 평생에 걸친 헌책방 순례를 이렇게 요약했다.

“중·고등학교 학생일 때는 남이 쓰고 팔아치운 헌 교과서를 싼값으로 사기 위해 드나들었다. 대학 시절에는 부족한 용돈으로 여러 권의 원서(原書)를 사는 맛에 드나들었다. 사회인이 된 다음에는 보통 책방에서는 찾을 수 없는 희귀한 책을 뜻밖에 만날 기회를 마련해주는 바람에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으로 드나든다.”

많은 사람이 헌책방에 대한 ‘노스탤지어’(鄕愁)를 갖고 있지만 헌책방에 관한 책은 뜻밖에도 드물다. 헌책방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헌책방의 역사는 이중연씨가 펴낸 『고서점의 문화사』(혜안, 2007)에 담겨 있다. 지금 이곳의 헌책방에 관해서라면 최종규씨가 쓴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 2004)와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 2006)이 거의 전부다.

『고서점의 문화사』에 따르면 서점은 조선시대에 서사(書肆) 또는 책사(冊肆)라 불렸다. 일제시대에는 서포(書<8216>), 책포(冊<8216>), 서점 등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 서점이란 말이 통용됐다. 책방(冊房)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기구이자 세종대왕이 만든 출판기관의 명칭이었다.

한국 최초의 서점은 약계책사(藥契冊肆). 1752년(영조 28년) 이전에 존재했다. 중인이 경영하고 몰락한 양반이 드나든 책방이었다. 『대명률』『열국지』 등과 한글책, 『요사스러운 술법』 등 당시 사대부 체제가 금기시하는 책들을 팔았다.

19세기 말에는 “종각에서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곡선을 긋고 나아간 큰길가에” 서점이 많았다. 1910년까지 서울에 있었던 서점은 최소한 68개. 그러나 1912년 경성조선인서적상조합에 가입된 서점은 23개에 불과했다. 일본 서점에 밀려서다. 대신 노점 서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1930년대 들어 종로 야시(野市) 헌책방이 급격히 성장했다. ‘국보’ 양주동은 거기서 한석봉의 『천자문』 등 진귀한 책을 싸게 샀다.

한국말로 된 구국계몽운동서적은 헌책방의 몫이었다. 헌책방은 조선학ㆍ한국학 연구의 산실이었다. 최남선ㆍ양주동ㆍ방종현ㆍ이희승ㆍ이병기ㆍ조윤제ㆍ김태준ㆍ이병도ㆍ황의돈ㆍ이인영ㆍ김양선 등 한국 근대학문의 선구자들은 대단한 고서수집가들이었다. 1930년대 최남선은 조선문화 관련서를 1~2년 사이에 수만 권을 사모았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금항당(金港堂ㆍ현재의 통문관) 사건’ 등 주로 고서점의 금서와 주인을 탄압했다. 해방 이후 고서점의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헌책방 전문가 최종규씨는 헌책방에 관한 한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다. 그의 책에는 전국의 헌책방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거리와 골목에 아직도 수많은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놀라움을 준다.

최씨에 따르면 헌책방을 좋아하는 사람은 헌책방 이야기를 잘 안 한다. 새책방과 달리 특정 책이 ‘딱 한 권’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영업비밀’을 속속들이 공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용산의 ‘뿌리서점’은 헌책의 흐름이 무척 빠르다. 헌책이 가장 많이 들락날락하는 헌책방이다. 홍익대 앞 ‘온고당’에는 그림책과 사진책이 가득하다. 독립문 ‘골목책방’에는 관공서 비매품 자료가 즐비하다. 고려대 앞 ‘새한서점’에는 이공계열 헌책이 많다.

그런데 옛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들 하듯이 헌책방을 좋아하면 정보에 뒤떨어지는 게 아닐까. ‘아니올시다’이다. 헌책방에서 책을 사는 사람은 새책방에 없는 책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 헌책방을 다룬 책으로는 영국의 한 마을 전체를 헌책방 마을로 만든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리처드 부스, 씨앗을뿌리는사람, 2003)와 헌책과 헌책방에 대한 오마주(hommage)인 『전작주의자의 꿈』(조희봉, 함께읽는책, 2003) 등이 있다. 리처드 부스는 헌책을 “대형 마트에서는 팔지 않는 물건, 그렇기 때문에 작은 마을의 희망이 되는 물건”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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