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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수’가 어느새 ‘친구’… 협상에 도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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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20면

김종훈 한국측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미국측 수석대표가 한·미 FTA 8차협상 때인 지난 12일 협상장인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악수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동훈기자 

“앰배서더 킴(김 대사), 우리가 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 있는데 나는 아직도 빈손이네요.”
“웬디, 이 세상에 쉬운 숙제가 어디 있겠나. 계속 고쳐나가야 정답에 도달할 수 있는걸.”

한·미 FTA 협상의 주역 김종훈과 웬디 커틀러

지난 21일(현지시간) 막바지에 접어든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고위급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미국 워싱턴 메이플라워호텔. 농업ㆍ자동차 등 핵심 쟁점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긴장된 얼굴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상대방의 양보만을 요구하다 그만 멋쩍은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양국의 협상 수석대표인 김종훈과 웬디 커틀러. 10개월을 끌어온 협상이 이제 타결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은 두 사람의 숨은 공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26일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통상장관급 ‘끝장 협상’에도 두 사람은 함께 참여해 마무리 작업을 벌이게 된다.

‘맞수’로 만난 두 사람은 어느새 ‘친구’ 이상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가 됐다. “차갑고 날카로운 설전을 벌여왔지만 장외에서는 수석대표로서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을 동병상련으로 이해하다 보니 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김 대표의 고백이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막후 협상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는 것이 양측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대표는 커틀러에 대해 “그동안 신뢰가 깨진 적이 없었다”며 “같이 일해볼 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기자들의 질문공세에도 “절충의 노력은 고통 그 자체”라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이 어려워진다”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3차협상 이후로는 종종 심야에 협상장 밖에서 따로 만나 술 한잔하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한다. 한번은 커틀러가 “피를 말리는 협상처럼 힘든 게 없다”고 토로하자 김 대표가 “우리는 전생에 글래디에이터(검투사)였을지 모른다”며 마음을 풀어주었을 정도다.

한국 협상단을 이끄는 김 대표는 주미대사관 경제참사관과 샌프란시스코총영사를 지낸 ‘지미파(知美派)’로 그 동안 외국산 담배 개방, 마늘 협상 등 굵직한 통상협상에 참여해온 베테랑 외교 관료다. 맞수인 커틀러는 미 무역대표부 한국 담당 대표보를 2년 넘게 맡고 있는 한국통으로 칼라 힐스ㆍ바셰프스키 전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 우먼파워의 맥을 잇는 미국 내 최고 통상 전문가다.

두 사람의 협상 스타일을 보면 김 대표는 상대방이 거부하기 어려운 낮은 수준에서 시작해 설득과 강약조절로 요구의 강도를 점차 높여가는 수순을 주로 밟는다. 이에 비해 커틀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청을 먼저 꺼내놓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버티다 ‘히든 카드’를 나중에 제시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전략의 차이로 협상은 종종 어긋나기도 했다. 지난 5, 6차 협상 때까지 미국 대표단은 자신들의 자동차ㆍ섬유 시장개방 개선안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미국은 오히려 불쑥 “협상 시한을 꼭 지킬 필요 있느냐. 시한을 넘겨 천천히 협상하자”며 압박을 가해왔다. 커틀러의 이런 강공과 김 대표의 유연한 대처가 어우러져 몇 합을 겨룬 끝에 결국 파국의 위기를 벗어났다.

한ㆍ미 FTA 협상이 여기까지 온 것은 공감대를 잃지 않고 접점을 찾으려 한 두 사람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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