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살인범도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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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13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재판 중인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런 무죄추정의 원칙이 일반인이 갖고 있는 소박한 정의감에 어긋나는 경우도 많다. 범행을 자백하고 증거도 명백한 연쇄 살인범이, 법정에서 뉘우치기는커녕 행패를 서슴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극악무도한 피고인도 무죄로 추정해 공정하고 편견 없는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이를 자연스럽게 수긍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은 ‘공정한’ 재판의 의미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렸다. 1994년 5월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머스레이딘이란 남자가 전처의 약혼녀를 총으로 쏴 죽인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다. 1심에서 방청석 맨 앞줄에 피해자 가족 3명이 피해자의 얼굴 사진이 담긴 큼지막한 단추를 옷에 달고 앉아 있었다. 잔인하게 살해된 피해자를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는 무언의 압력을 재판부에 넣은 것이다. 피고인은 정당방위라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머스레이딘은 헌법상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했다며 항소했다. 법정에서 피해자의 사진을 보임으로써 판사와 배심원들에게 공정하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연방 항소법원은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 얼굴 사진이 법정에서 노출된 것이 피고인에게 근본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해 불공정한 재판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이를 뒤집고 유죄를 최종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재판 중 수의(囚衣)를 입도록 강제하는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어 헌법에 위반한다는 1976년의 대법원 판결을 이번에 재확인했다. 하지만 편견을 일으킬 수 있는 행위를 정부가 강제하는 것과, 재판에 참여한 일반인이 하는 것은 다르다고 보았다. 즉, 피해자의 가족이 피해자 사진이 담긴 단추를 착용한 것 정도로는 재판이 불공정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이번 대법원 판결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피해자 사진이 담긴 단추를 달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재판이 취소될 뻔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일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중국의 문화혁명 때 피고인들을 죄인으로 단정짓고 인민재판을 했던 걸 생각하면, 막연한 여론몰이에서 독립된 공정한 재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대중의 정의감이란 가변적이고, 때로는 무척 위험하다. 이런 것들로부터 독립된, 공정한 재판은 쉽게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단추를 두고 연방법관들이 갑론을박한 것을 일소(一笑)에 부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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