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5. 골프 입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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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젊은 시절 오른손의 힘이 강하 게 느껴지는 스윙을 했다. [중앙포토]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에너지가 넘쳐서인지 어디 한 군데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친구들과 공을 차거나 동네 야산을 돌아다녔다. 싸움질도 많이 했던 장난꾸러기였다.

집 근처에 있던 군자리골프장(서울컨트리클럽)도 나의 놀이터였다. 호기심에 틈만 나면 울타리 너머 골프장을 기웃거렸다. 골프는 어떻게 치는 걸까. 어떻게 그 작은 공을 작대기로 치고 노는지 궁금했다. 골프를 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하지만 채도 없고, 한번 쳐보라는 사람도 없었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골프를 배울 방법도 전혀 없는 듯했다.

1954년 여름 나는 다짜고짜 클럽하우스를 향했다.

"골프장 캐디를 하면 돈도 벌 수 있고 잘하면 골프를 배울 기회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해줬던 것이다. 지금은 캐디가 대부분 여자이지만 그 당시 캐디는 남자의 직업이었다.

캐디 마스터를 만나 무턱대고 "캐디를 시켜달라"고 떼썼다. 당시 캐디 마스터는 일제시대부터 골프장에서 근무해 온 조수철씨였다. 그분은 "어린 녀석이 무슨 캐디냐"며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자꾸 골프장에 드나들며 떼를 쓰자 어느날 "이 녀석 자주 오네. 그래 오늘 어디 한 번 해봐라"라며 골프가방을 내줬다.

신바람이 난 나는 가방을 메고 골프장을 마구 뛰어다녔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지금은 전동카트도 있고, 손수레도 있지만 그땐 그런 기구가 없었다. 한 명의 골퍼에 한 명의 캐디가 붙어 가방을 메던 시절이었다. 주말마다 골프가방을 메는 것으로 골프와 접하게됐다.

이듬해인 55년 드디어 나에게도 골프클럽이 생겼다. 골프장 손님 한 분이 나에게 낡은 5번과 7번 아이언을 준 것이다. 너무 기뻤다. 그 골프채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어깨너머로 남을 흉내내는 것이었지만 진지하게 골프를 연구했다. 내가 전성기 시절 아이언샷을 잘 쳤던 이유도 아마 그때의 연구와 연습 때문인 것같다.

요즘은 TV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스리클럽 챌린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퍼터를 포함해 클럽 세 개 만으로 라운드를 하는 것이다. 나는 60년대 중반 '원클럽 챌린지'를 한 적이 있다. 서울컨트리클럽에서 5번 아이언만으로 9홀을 돌아 2오버파 38타를 쳤다. 퍼팅도 5번 아이언으로 했다. 당시 나와 함께 라운드했던 아마추어 골퍼는 80대 초반을 치던 분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클럽을 모두 사용했는데 6오버파를 쳤다. 그런데 이 사실이 골프계에 널리 퍼졌다. 내가 언더파를 쳤다는 것이었다. 골프를 치는 독자들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내가 얼마나 아이언을 잘 쳤겠는 지를.

나는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한 가지 훈련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어떤 클럽이든 가장 자신있는 클럽을 하나만 만들라는 것이다. 7번이든 8번이든 관계없다. 집중적으로 연습해서 마음먹은 대로 공을 그린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무기'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골프는 쉬워진다.

한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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