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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기다리는 여심|「군인아내의 길」육 여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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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창천에 기러기 훨훨 날아가는 맑고 갠 오늘 신랑 박정희군과 신부 육영수양은, 바라건대 세상은 회오리바람 그칠 줄 모르느니… 신랑의 억센 기품과 아름다운 신부의 온순함이 화합되어 서로 도와, 푸른 강가에 원앙새 한쌍 훨훨 날아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박정희 중령의 대구사범 시절 스승인 김영기 씨의 결혼 축사는 고색 창연했다. 피로연은 대구시내 일식집에서 열렸다. 대구 사범동창과 군선후배들이 함께 어울려 이들의 백년가약을 축하해 주었다. 늦은 밤, 거나하게 취한 박정희 신랑은 육영수 신부의 손을 잡고 삼덕동 신방으로 향했다. 방 두칸짜리 전세방이었다. 부엌조차 없는 곳이어서 이들 신혼부부는 현관을 개조해 부엌을 새로 냈다.
6·25 전란 중인데다 남편이 군인 신분이어서 장래는 지극히 불투명했다. 그 때문에 박 중령을 향한 육 여사의 애정은 오히려 더욱 애틋했다.

<재혼인줄 알았다>
이들은 처음 맞선 본뒤 서로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두 남녀의 만남을 주선했던 송재천씨(73)의 회고.
『선을 본 후 육 여사에게 어떻더냐고 은근치 물어보았더니「키가 작고 오종종한게 조금 걸리지만 말하는 태도는 아주 침착하더라」고 해요.「군화를 신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믿음직해 보이더라」는 말도 하고요. 박 중령 쪽을 떠봤더니 원래 자기 속마음을 잘 나타내지 않는 분이긴 했지만 그리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박 중령의 육사 후배(5기)인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씨(65·현 한중 예술연합회 회장)는 이 결혼식이 성사되도록 적극적으로 나선 축이었다. 김씨는『박 중령은 처음에는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 기색이었다』고 기억했다.
『「그 처녀 어떻습니까」고 물으니 박 중령께선「글세, 키는 멀쑥하니 크고 한데…」라며 얼버무리더라고요. 그래서「아, 총각결혼도 아니고… 대강 마음에 맞으면 결정하시죠」라고 권했습니다. 여전히 묵묵부답이더군요. 더 캐묻지 않고 지냈는데 얼마 후부터는 틈만 나면 옥천의 육 여사 댁을 다녀오곤 하는 눈치였어요.』
중매를 성사시킨 송재천씨는 박정희 중령에게 결혼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분을 소개할 당시에는 박 중령 주위에 여자가 없었습니다. 그분으로부터「결혼을 일찍 했지만 서로 이상이 안맞아 이혼했다」는 말을 들었지요. 육 여사의 어머님(이경령 여사)께는 사실대로 귀띔해 드렸어요.』

<꿈같은 7일간 면회>
송씨의 증언대로라면 육 여사도 사전에 모친으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들었을 것이다. 결국 육영수 처녀는 박정희 중령의「사람됨」을 보고 시집가기로 결단을 내린 듯하다.
대구 삼덕동에서의 신접살림 닷새만에 박 중령은 부대(9사단)이동에 따라 강원도 평창으로 떠났다. 군인의 아내로서 육 여사에게는 긴 기다림의 세월이 시작됐다.
전쟁중이라 신혼휴가는 물론 얻지 못했고, 박 중령은 결혼 다음날부터 출근했던 터였다. 51년 2월 육 여사는 한복 위에 군복을 걸쳐 입고 군용 스리쿼터를 타고 남편 면회길에 나섰다.
이종사촌간인 송재천 중위가 안내역을 맡았다. 만 24시간을 달려 9사단이 주둔해 있던 강원도 정선에 도착했다. 박 중령(당시 사단참모장)은『그 사람 뭐 하러 왔대』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육 여사는 꿈 같은 1주일을 남편과 함께 산속 막사에서 보내고 대구로 돌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신혼부부에게는「내집 마련」이 가장 큰 희망이요 숙제다. 삼덕동 집에서 시작해 1956년 4월23일 드디어 집 한채(서울 신당동)를 마련하기까지 박정희 부부는 서울·대구·광주 등지로 모두 여덟 차례 셋방을 전전했다. 군인시절의 박정희는 잘 알려진 대로 청렴 강직했다. 집안살림에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술을 매우 좋아했고 여자문제에는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할 것 없이 관대했다. 남자의「허리아래」문제는 시시콜콜 따지지 않는다는 일본식 사고방식이 그에게는 있었다.
박정희 대령시절 부관이었던 원병오 교수(63·조류학자·현 경희대 교육대학원장)는 박 대령의 첫 인상에 대해『작은 덩치, 검은 얼굴에 양 귀가 앞쪽으로 꼬부라져 아주 안좋은 인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부관으로 차출돼 모시게 되면서부터는 엄격한 가운데 따스한 정도 베풀 줄 아는 그 분을 믿고 따르게 됐습니다. 공사가 분명했지요. 박 대령은 종종「일본군들은 밤새 술을 마실 때는 상관의 머리를 젓가락으로 툭툭 두들길 정도로 임의롭게 행동하지만 날이 밝아 일단 근무시간이 되면 철저히 상명하복을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또 부대가 출동명령을 받았을 때 휘하장교의 부인이 작별인사차 부대를 찾아오면「군인이 어떻게 부대출동 사실을 안식구에게 발설할 수 있는가」고 그 장교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집안 일엔 무관심>
육 여사는 남편의 임지가 바뀔 때마다 대구에서 광주로, 다시 서울로 이사를 다녔다. 53년7월 박 대령이 강원도 양구의 3군단 지역에서 포병단장으로 있을 때 원병오 중위는 서울 동숭동의 단칸 셋방에서 살던 육영수 여사를 처음 보았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었는데 꼭 앳된 여학생 같은 인상이었지요. 그 점 외에는 그저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평범한 주부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동숭동 셋방은 유독 문지방이 높아 돌이 갓 지난 큰딸 근혜양이 자주 걸려 넘어졌다. 후일 박대통령은 이 시절에 대해『넘어져 다쳐서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근혜, 그리고「사람 사는 꼴이 말이 아니구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고 털어놓았다.
집안 일에 무관심했던 박 대령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원병오 부관에게 이사갈 집을 알아보라고 부탁했다.『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때 돈으로 5만환 가량을 주변서 독채 전셋집을 얻어보라고 해요. 어림없는 금액이었지요. 고민하다가 서울 고사배동(현 신설동)의 사촌누님 집을 생각해냈지요. 누님부부에게 사정해 먼저 세든 이들을 얼마간 돈을 주어 내보내고 박 대령 식구를 이사시켰습니다. 월세로 5천환씩을 내기로 했지요.』
고사배동으로 이사(53년 10월)한 직후 11월25일자로 박정희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했다. 드디어 별을 단 것이다. 해가 바뀌어 54년 1월17일, 박 준장은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육군포병학교로 5개월 예정의 유학을 떠났다. 육 여사는 둘째딸(근영씨)을 임신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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