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57년 만에 햇빛 본 학도병 유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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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치아가 드러난 유골, 찌그러진 회중시계, 녹슨 탄띠와 십자가…. 한국전 당시 고교생 신분으로 지리산 화개장터 전투에 참가했다가 산화한 학도병들의 유품들이 57년 만에 처음으로 발굴됐다. 어린 나이의 그들이 가졌을 불굴의 용기, 전쟁에 대한 공포가 오버랩돼 우리를 처연케 한다.

이들 학생이 참전한 것은 무슨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조국이 공산주의화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충정뿐이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소총을 잡은 용기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된 것이다. 이들의 희생이 대한민국을 소생시키는 데 소중한 밀알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학도병을 포함해 미수습된 한국군 유해는 13만5000위라고 한다. 그중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는 1200여 구에 불과하다. 유족까지 확인된 사례는 겨우 20여 명에 그친다. 미국은 북한 땅에 묻혀 있는 전사자들의 유골을 벌써 200여 구 이상 가져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땅에 있는 대부분의 유해조차 챙겨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다.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용사들의 유해를 이렇게 반세기가 넘도록 방치하는 국가를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이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미국이 수십 년에 걸쳐 전사자의 유골을 지구 어디든지 가 끝까지 챙기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다. 그런데 이 나라에선 어린 나이에 국가를 위해 희생한 학도병들의 시신이 60년 가까이 차가운 땅속에 있었다니 기가 막힌 일 아닌가. 또다시 유사 상황이 벌어질 때 누가 앞장서 총을 들겠는가.

정부 차원에서 유해 발굴 사업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연 30억여원의 예산과 80여 명의 조직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향후 수년간은 좀 더 집중적으로 역량을 투입할 필요가 있다. 유해 발굴 사업이 점점 세상을 뜨고 있는 참전자들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