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양심은 죽었는가|LA 참극 부른 미 사회 진단|테리 맥밀런<미·흑인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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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미국사상 최악의 인종분규로 기록된 이번 LA 흑인폭동 은 미국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의 흑인 소설까 테리 맥밀런은 이번 사태로 미국이 자랑하는「정의로운 사회」이미지는 큰 상처를 입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국가적 과제로 다뤄야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그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기고한 칼럼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나는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를 처음 보았을 당시의 충격을 지금도 생생치 기억하고 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처음엔 남아공쯤에서 발생한 사건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LA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때는 1991년.
경찰은 마치 자신들을 물려고 달려드는 개를 다루듯 로드니킹을 발로 차고 곤봉으로 때려 그가 완전히 도로 위에 까무러칠 때까지 폭행을 계속했다. 무려 56회나 타격을 가했다.
사건이 보도된 1주일 후 나와 내 동료들은 그 비디오 테이프를 볼 때마다 잔혹성에 치를 떨었다. 나와 내 동료들은『경찰의 잔혹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폭행가담 경찰들은 구속될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명백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저녁 내 누이가 로드니 킹 사건의 평결 내용을 나에게 얘기해줬다.
재판은 백인 집단거주지인 캘리포니아 시미밸리 법원에서 열렸으며, 폭행사건에 관련된 4명의 경찰 중 1명을 제외하곤 모두 무죄평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고통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20년 전 나는 LA에서 살았다.
나는 LA에 대해 깨끗하고 안전하며 지루한 도시라는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밤중에 경찰의 헬리콥터가 주거지역을 비행하는 사실을 보고 LA가 이제 하나의「경찰국가」가 됐다는 느낌을 갖게됐다. 적어도 흑인과 히스패닉계가 사는 곳은 그랬다. 백인 부유층이 사는 베벌리힐스나 맬리부 해안 상공에 경찰 헬리콥터가 뜨는 것을 본 적은 한번도 없다.
조지 부시대통령은 그런데도 미국을 여전히「모든 사람의 천국」이라 생각한다니 가슴이 터진다.『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노래하면서 이런 인종차별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나는 분노한다.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도대체 흑인이 폭행 당한 사건에 흑인을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고 배심원을 구성하는 것이 하늘아래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백인은 미합중국 헌법과 권리장전을 만들어놓고 신과 정의를 부정한단 말인가.
이번 평결은 비디오로 촬영되지 않은 로드니킹의 행위도 고려됐다고 한다. 그렇다고 치자. 과연 술에 취한 그가 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4명의 거한들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폭동이 일어나고 TV에서 불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흑인들이 왜 그토록 분노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화는 치밀고 의지할데는 없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주먹을 휘두르게 마련이다. 흑인인 톰 브래들리 LA시장은 사과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로드니킹을 폭행한 경찰관 4명이 석방됐을 때 나는 미국이 인종차별의 나라이며 사람 살 곳이 못되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내 동생도 음주운전으로 지금 감옥에 있다. 다행치 그는 폭행 당하지는 않았다.
똑같이 음주 운전한 백인들 중 감방에 가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묻고 싶다.
또 로드니킹처럼 비디오테이프에 찍히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마구 두들겨 맞아왔는지 아는가.
나는 결코 경찰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경찰배지는 나에게 안전보다는 괴롭힘을 상징한다. 경찰권은 몇몇 사람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다. 권력이란 언제나 남용될 소지가 있다. 이번 사태도 예외가 아니다.
백인이건, 유색인이건 미국인들이 느끼는 굴욕감은 일리 있는 것이다. 이제 초점은 불공평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들의 분노로 모아지고 있다.
미국 국가에『미국은 자유인의 당이요, 용감한 자의 집』이라고 한다.
나는 폭력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와 로스앤젤레스시 당국은 다시 이번과 같은 사건이 재발된다면 우리가 폭력에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우리는 또 이를 알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할 수밖에 없다.
킹 사건 배심원들은 아스팔트 바닥에 누인 채 발길로 채이고 곤봉으로 뭇매질을 당하는 것이 어떤가를 알아야 한다. 킹을 구타한 경찰들은 진작에 수감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신의 은총을 갈구한다면 미국인의 양심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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