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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샘물 어디서 찾나(권영빈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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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시골 국민학교를 다녔던 소년은 일요일이면 개구리를 잡으러 들판과 개울을 헤매고 다녔다. 어머니가 키우는 닭 사료용으로 개구리를 한보따리 잡아오면 소년에겐 몇푼의 전갈이 용돈으로 쥐어졌다.
한달가량 용돈이 모이면 소년은 소읍 네거리에 있는 서점으로 줄달음쳤다. 마해송선생의 동화집 『떡배 단배』를 사기도 했고,그때 김성환선생의 만화 『꺼꾸리군과 장다리군』이 막 연재를 시작했던 학원잡지에 코를 박고 심취하기도 했다.
○폭력 우상화 하는 시대
그러나 개구리 헌팅으로 벌어들인 용돈이 소년의 독서량을 메우기엔 너무 부족했다. 그날따라 소년은 『새벗』도 읽고 싶었고 『꺼꾸리군과 장다리군』도 보고 싶었지만 돈이 모자랐다. 마침 쌀뒤주 위에는 조금전 어머니가 달걀을 판돈이 놓여 있었고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앞뒤를 가라지 않고 그 돈을 집어든채 서점으로 달렸다. 한시간 뒤,화가 난 어머니는 좀도둑이 된 아들의 손을 끌고 서점에와서 현장검증을 마쳤다. 이후부터 소년은 그 서점 앞을 지나는게 부끄러워 발길을 끊었다.
소년이 자라 성년이 되고 다시 중년이 한참 지나서야 소년 또래의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어 어린이날을 맞게 되면 그 때의 부끄러웠던 기억이 애잔하게 되살아난다.
저녁상을 물린 아버지가 아들을 찾았지만 집안에는 없었다. 학교 다녀온뒤 가방을 팽개치고 나갔는데 지금껏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이 유괴납치가 기승을 벌이는 판에 이게 웬일이냐고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나섰다. 어스름한 저녁 골목길을 누비던 아버지는 비탈진 빈터에서 「야! 죽어봐라!」「억!」하는 외마디 소리를 듣고 달려가본다.
마치 슈워즈네거처럼 윗통을 벗어제친 소년이 람보의 기관단총을 든채 이웃집 아이와 총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집안에선 한번도 본적이 없던 실물형 기관단총을 언제,어디서,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아버지는 신문했다. 할아버지가 주신 용돈 5만원으로 학교앞 문방구점에서 며칠전 샀다는 것이다. 집에 가져오면 야단맞을까봐 빈터 숲속에 숨겨두었다가 저녁이면 나와서 논다고 했다.
○생명 없는 지식 전수
화가 치민 아버지는 아들 손을 끌고 문방구점으로 들이닥쳤다. 『어째서 철없는 아이에게 이런 흉기를 팔 수 있느냐』고 아버지는 따지고 들었다. 『아니 왜 화를 내고 아이에게 겁을 주세요. 요즘 애들치고 이런 장난감 가지지 않는 아이 어디있나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얘야 괜찮다. 울지말거라.』 문방구점 여주인은 별꼴 다보았다는듯 휑하니 등을 돌렸다.
두편의 삽화에서 보듯 아버지와 아들의 시대는 이처럼 달라졌다. 우선 용돈마련 방법과 화폐단위가 달라졌으며,소년기에 공유했던 경험의 도구가 달라졌다. 노동의 대가로 쥐어졌던 소액의 용돈이 이젠 인사 한번으로 거액이 들어올만큼 생활형편이 좋아졌다.
『떡배 단배』라는 동화책 한권으로 아버지 세대는 소년기의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었지만,요즘 아이들에겐 무차별 살육의 폭력영화와 쿵후 비디오가 있고 『북두신권』이라는 수십권짜리 일제만화가 골목마다 넘쳐난다.
이뿐인가. 부모가 보다 남긴 포르노 테이프까지 아이들의 차지가 되어 국민학생중 46%가 성인용 음란비디오 테이프를 집에서 봤다는 놀랍고도 놀라운 응답이 전교조의 설문조사 결과로 나와있다.
『좋은 글은 어린이들에게 상상력과 창조력을 길러주고 그들로 하여금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건강하고 용기있는 한 인간으로 자라나게 하는 더 없이 좋은 천진성의 촉매입니다.』
제1회 「황금도깨비상」을 발표한 「민음동화」창작 아동문학상을 제정한 취지문의 한 구절이다.
어린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의 원칙과 규범을 상실한 시대에서,생명없는 지식의 전수와 점수만으로 재단되는 어린이들에게 상상력의 뿌리를 키워주고 혼탁한 현실을 씻어줄 환상의 샘물로 창작동화를 응모한다는 「황금도깨비상」제정의도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동화책 읽히는 슬기
어린이들에게까지 폭력과 섹스의 범람을 강요하는 세태속에서 비록 계간이긴 하지만 환상의 샘물을 퍼마시게 할 작은 샘터로 동화잡지가 아직도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일의 희망을 그나마 잃지않게 한다.
어린이날 서울대공원을 향한 기나긴 자동차 대열을 보면서 한권의 동화책을 아들에게 읽히는 아버지의 슬기가 한결 돋보이는 험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깊이 탄식하는 하루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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