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루기… 힘뽐내기…/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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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동란이후 어린이사회에서는 딱지치기 놀이가 한동안 대유행이었다. 전쟁뒤끝인 탓이겠지만 딱지의 그림들 가운데는 군의 계급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감췄던 딱지를 동시에 서로 보여주고 높은 계급의 딱지를 가진 아이가 상대방 것을 따먹는 게임이 그중 인기가 있었다.
당시 「갈매기」로 불리던 V자 3개의 계급은 이등중사였는데,경찰관의 계급가운데 경사도 똑같이 「갈매기」가 3개였다. 아이들은 군인의 「갈매기」 3개와 경찰관의 「갈매기」 3개중 어느 것이 더 높은가로 틈있을 때마다 열띤 논쟁을 벌였다.
○50년대의 딱지놀이식
계급장의 모양이 같다고해서 군인과 경찰관의 높낮이를 따질 수는 없는 것임에도 어린이들이 그처럼 의미없는 논쟁을 벌인 까닭은 모든 계급을 똑같은 차원에 놓고 힘의 논리로,혹은 약육강식의 논리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어린이들이 성장기의 학교생활을 통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배우고,그와 비슷한 원리로 군인과 경찰관의 계급이 하나로 묶여져 높낮이를 따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50년대에 딱지로 계급장 놀이를 했던 오늘날의 40대중반에서 50대중반에 이르는 세대들가운데 모든 계급과 그에 따른 권력이 소속된 테두리안에서만 계급에 걸맞은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령 학교시절에 배운대로 입법·사법·행정은 각기 독립돼 있으므로 서로 침범하지 못한다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그대로 지켜져 입법부를 대표하는 국회의장과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원장,그리고 행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똑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궁금하다.
그 까닭은 해방이후의 역대 정권을 거치는 동안 서로 침범하지 못할,침범해서는 안될 권력과 권력의 힘겨루기현상이 줄곧 되풀이돼왔기 때문이다.
특히 5·16군사혁명이후 권력과 권력의 맞부딪침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 아무런 상관없는 기관끼리임에도 어느 쪽의 「힘」이 더 강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 삼척동자도 선뜻 대답할 수 있을만큼 권력간 힘의 높낮이는 모든 국민의 「양해사항」처럼 돼있는 것이다.
○만만한게 힘없는 백성
5공화국 치하에서 「뭐위에 뭐가 있고,그 뭐위에 뭐가 있다」는 말이 줄곧 나돌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우스갯소리만은 아니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민주화가 이전의 정권들에 비해 크게 진전됐다고 누구나 믿고 있는 6공화국 치하에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최근의 몇가지 사례들을 생각해 보자.
지난 3월의 14대 총선때 안기부직원 4명이 민주당후보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흑색선전물을 살포하다가 민주당 선거운동원에게 붙잡혀 구속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나라 검찰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감안할때 그 정도의 사건을 검찰이 쉽사리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자체가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바로 며칠전에는 술취한 검찰청 직원들이 근무중인 경찰관들을 집단폭행하고,파출소에 연행된 뒤에도 집기를 부수는등 행패를 부려 물의를 빚었다. 비록 사소한 일일수도 있지만 이 두개의 사건을 통해 잠깐 들여다본 검찰의 위상은 50년대의 딱지놀이식으로 표현한다면 「검찰은 안기부보다 낮고 경찰보다는 높다」고 해야할 것이다.
얼마전 검찰청 서울 어느 지청의 한 30대 남자가 참고인으로 부른 거의 어머니뻘의 여인에게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그같은 행태는 새삼스러울 것도,충격적인 일도 아닐만큼 일반화되어 있다. 이 경우는 하나의 조그마한 예에 불과하다. 어떤 기관에서든 그보다 강한 힘을 가진 기관에 대해서는 권력의 꼬리를 내리고,그저 만만한 것이 힘없는 백성들이다.
강자에게는 약하고,약자에게는 강한 것이 권력의 일반적인 속성이기는 하다. 곧 약육강식의 논리가 가장 적절하게 적용되는 것이 권력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도대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누구로부터 부여받았으며,그 권력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국민­권력자 깨우쳐야
우리나라의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들이 만들어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생각하는 권력자들은 얼마나 있는지,저네들의 권력은 내가 준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국민이나 권력자 모두가 그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권력끼리의 힘겨루기나 국민을 권력의 밥쯤으로 생각하는 권력자들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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