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41회 KT배 왕위전' 슬럼프의 정체슬럼프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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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8강전 하이라이트>

○ . 최철한 9단 ● . 이성재 8단

장면도(40~55)=흑▲의 부드러운 젖힘으로 백의 예봉은 목표를 잃었다. 부드러움은 능히 강함을 이긴다는 옛말은 틀림없다. 최철한 9단은 망연자실 판을 들여다보다가 40으로 끊어버렸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40으로 끊은 이상 이후는 소위 '외길 수순'이다. 54로 두 눈을 내고 살기까지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외길이다. 결과는 어떤가. 백은 흑의 우변을 돌파했다고는 하지만 간신히 쌈지를 뜨고 살았다. 하변 쪽 백은 47의 한 방으로 기상이 꺾였다. 돌의 형태는 나무처럼 태양을 향해 머리를 내밀어야 하는데 그만 그늘 속에 갇히고 만 형상이다.

52 쪽의 백 두 점도 당장 흑을 제압할 수는 없는 모습이다. 반면 흑은 55로 꽉 이은 두터움이 사해를 압도한다. 이 두터움은 앞으로 만사를 순탄하게 만들어줄 든든한 '백'이 아닐 수 없다.

"(최철한 9단이) 슬럼프는 슬럼프인가 보네." 구경하던 프로기사가 혼잣말처럼 한마디 던진다. 슬럼프라. 슬럼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슬처럼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던 수에 대한 감각이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는 것일까. 성공과 실패조차 무덤덤해지고 현실보다는 환상이 머리를 지배하는 그런 것일까.

'폭삭 망했다'는 표현이 그리 과장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다. 이창호 9단을 연파할 때 초반이 누구보다 견고하던 최철한 9단이었는데 요즘은 이처럼 초반에 크게 실패한 뒤 힘겨운 추격전을 벌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다시금 냉정하게 판을 살피면 흑도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당면 과제는 하변 백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인데 그 첫수는 어디가 최선일까.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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