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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성장 몸살 앓는 태국|기반 시설 부실|임금·땅값 급등|공해 "위험 수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태국 돈무앙 국제 공항에 내리면 희뿌연 안개와 맨 먼저 만난다.
후텁지근한 열기와 함께 코끝을 톡 쏘는 듯한 매콤한 냄새. 스모그다.
방콕 시내에 굴러다니는 차량과 오토바이만도 1백만대.
배기가스 배출 기준도 없고 차령 제한도 없다. 귀를 따갑게 하는 오토바이의 소음과 시커먼 연기를 달고 다니는 차량으로 방콕은 아침녘 해풍이 잠시 스모그를 거둔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몸살을 앓는다.
방콕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방나하이웨이 주변에 줄지어 들어선 외국 합작 공장들의 굴뚝에서도 쉼 없이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태국에는 대기 오염에 대한 별다른 기준이 없다.
청백리로 알려진 잠롱씨는 방콕 시장 당시인 2년전 모든 교통 경찰에 대해 마스크 착용을 금지시켰다. 공해 때문에 국제 관광 도시 방콕의 이미지를 나쁘게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요즘 방콕시내 교통 경찰관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당국에서도 더 이상 벗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기 오염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일 자본 등에 의존>
교통 체증도 서울보다 훨씬 심하다. 잠롱씨도 외출할 때 자신의 승용차 뒤에 항상 오토바이를 따라다니게 해 길이 막히면 오토바이를 타고 약속 시간에 맞출 정도다.
『태국은 과성장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장의 한계인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입니다』
대한 무역 진흥 공사 방콕 무역관 정명규 관장의 진단이다.
지난해 태국의 경제 성장률은 8·2%. 89년의 12%, 90년의 10%에 비해 조금 낮아졌지만 지난해 세계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와 비교하면 초고속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수출도 90년에 비해 17%가 늘어난 2백70억 달러에 달했고 수입은 15%가 증가한 3백75억달러를 기록했다.
이 같은 높은 경제 성장세에도 물가 상승률은 89년 5·4%, 90년 6·3%에 이어 지난해에는 6·0%에 그쳐 태국은 안정적인 성장을 계속하는 아세안 (동남아 국가연합) 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잡았다.
태국 개발 연구원 아누팝 티라랩 박사는 『이 같은 성장이 계속되면 신흥 공업국의 꽁무니인 한국을 따라잡을 수도 있다』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러나 밝은 면이 드러날수록 어둠의 골도 깊다.
급속한 성장에 따라 임금과 땅 값이 치솟고 공해 문제도 심각하다.
또 사회 간접 자본의 부족과 외국 자본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있다.
많은 사람들은 쿠데타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태국의 가장 힘센 집단으로 군부를 꼽는다. 명문가 출신의 자제들은 대부분 예비 사관 학교에 들어가 군 고위 장성이나 경찰 간부로 성장한다.
실제로 이들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다.
하지만 방콕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외국인들은 이들 뒤에 숨은 화교와 일본 세력을 주목한다.
태국의 화교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철저히 현지화 되어 있다.
이들은 중국말도 하지 못하고 태국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다..
태국 부의 상당 부분은 뛰어난 상술을 발휘하는 이들 손에 쥐어져 있다 .
하지만 매달 한번씩 일본 대사관이 주최하는 파티는 태국에서 가장 중요한 모임으로 꼽힌다.
20년 전부터 일본 문부성이 전액 자금을 지원,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의 인재들을 자국에 불러들어 유학시킨 뒤 이들을 대상으로 매달 현지 대사관이 파티를 열어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일본의 막강한 자본을 바탕으로 이 모임은 소리나지 않게 힘을 넓히고 있다.
그래서 태국에는 「정치는 군부, 경제는 화교가 장악하고 그 뒤에는 일본이 모든 것을 조종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실제로 태국의 TV를 보면 전국 노래 자랑 등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일본 기업이 후원한다. 또 방콕 시내 1백만대의 차량 가운데 85%가 도요타·닛산 등 일본 제품이고 오토바이도 90%가 혼다·스즈키 등 일제다. 도쿄 백화점 등 방콕 시내 백화점에는 일본 상품들로 넘쳐나고 거리의 광고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을 일본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현재 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무려 3만5천명. 이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방콕에는 초·중·고등학교가 모두 개설돼 있다.
일본의 주요 언론 매체들도 빠짐 없이 방콕에 특파원을 두고있고 종합 상사 등 태국 현지 일본인들은 군부·경찰·기업·언론 등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구축해 놓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태국의 화려한 경제 성장 뒤에는 일본을 비롯한 외국 자본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태국의 수출 가운데 외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5%나 되고 태국 경제 성장의33%를 일본 기업이 떠맡고 있다.
이에 따라 외국 자본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으면 태국 경제는 정체하게 마련이고 최근 이 같은 조짐이 나타나 태국 정부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노동 집약 산업 탈피>
태국 투자청에 따르면 89년의 외국인 투자 신청은 8백56건(승인 5백7건)으로 피크에 달했다가 90년에는 6백37건(승인 4백47건), 지난해는 9월말 현재 2백93건 (승인 2백67건)으로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89년 39건, 90년 28건, 지난해 9월까지 13건의 투자 신청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한 건의 투자 문의도 없었다』고 방콕 무역관은 밝혔다.
그 동안 태국의 땅값과 노임이 지나치게 뛰어 싼 맛의 메릿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해외 자본이 밀려들고 있다.
촌부리의 스리라차 산업 공단에 자리잡은 삼성전자 김시정 과장은 『88년 공장을 착공할 때 평당 60달러에 1만1천평의 부지를 사들였는데 현재는 평당 거의 2백달러까지 치솟았다』 며 『저임금이나 낮은 땅값을 노려 태국에 진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말했다.
방파콩 지역에 있는 금성사 한경훈 과장도 『88년 진출 당시 월 평균 70달러에 불과하던 비숙련 근로자의 노임이 현재 1백40달러로 4년만에 두배나 올랐다』며 『방콕 시내 35평짜리 외국인 아파트 임대 비용만도 한달에 1백20만원 수준』이라고 혀를 찼다.
사회 간접 자본도 팽창하는 산업 시설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금성사 한 과장은 『전화선이 적어도 5회선 이상 되어야 하는데 현재 3회선에 불과하고 팩시밀리 회선도 1개로 버티고 있다』며『신청한지 6개월이 넘었는데도 증설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력 사정도 원활치 않아 삼성 전자의 경우 잦은 단전과 전압이 불안정해 임시 발전기와 자체 변전기를 항상 대기시켜놓고 있다.
높은 임금·땅값과 부족한 사회 간접 자본 등 급속한 상황 악화로 인해 태국에 진출한 일부 외국 기업들은 인도네시아쪽으로 공장을 이전시키고 있다. 낮은 임금을 노려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태국의 임금과 땅 값을 올려놓은 외국의 노동 집약 기업들이 결국 높은 임금 때문에 다시 임금이 더 싼 인근 국가로 흘러 넘치는 현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도 일단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태국 개발연구원의 티라랩 박사는『이제 태국 산업의 질도 한 단계 발전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더 이상 단순 노동 위주의 해외 자본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태국의 가장 큰 재벌인 시암사는 처음으로 제철 공장을 완공시켰다.
비록 외국과의 합작 제철소이지만 의류·봉제 위주의 태국산업구조에서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태국 정부는 방콕 주위에 들어오는 외국 기업에 대한 특혜를 대폭 줄였다. 대신 태국북부지역에 투자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상당한 세제 혜택을 약속하고 있는데 이는 나름대로 국토 균형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태국이 현재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과 고급 기술 교육이다.
태국 정부는 앞으로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을 위해 40억 달러의 투자 재원을 마련해두고 있다.
우리로 치면 경부 고속도로와 같은 방나하이웨이의 중간쯤인 차방지역에는 대규모 항구가 들어서고 있다. 늘어나는 물동량을 방콕항 대신 이곳을 통해 곧바로 빼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방콕에서 3시간 거리인 방나하이웨이의 끝 레온에는 대규모 석유 화학 단지가 건설되고 있는 등 방나하이웨이를 따라 태국의 서부 임해 공업 단지도 점차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제2의 도약 채비>
정부는 앞으로 3년 동안 50만회선의 전화 회선을 증설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고 땅값 상승에 힘입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은 대형 빌딩들이 방콕에 들어서고 있어 외국 기업들의 사무실 임대난은 조만간 풀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대학에서는 부족한 중간 관리자를 양성하기 위해 금속 공학·전자 공학 등 각종 공학 및 경영학 관련 학과들의 신설이 붐을 이루고 있다.
『한국처럼 차관 도입에 의존하기보다 외국 자본의 직접 투자를 유인해 경제를 일으킨 태국으로서는 결국 남는 것이 근로자의 노임과 외국 기업에서 배운 기술밖에 없습니다. 첨단기술의 외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철수하는 기업들을 대신해서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공장을 세우는 것만이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태국 투자청 한 관리의 말이다.
이처럼 동남아의 선두 주자 태국은 한편으로는 개방 경제와 과열 성장에 따른 고통과 또 한번의 도약을 위해 하루가 다르게 변신하고 있다.
방콕무역관 오준용 과장의 말은 시사적이다.
『태국 등 동남아가 한국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논쟁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 동안 태국에 진출한 우리의 개별 기업들은 성공했지만 한국 전체적으로 불 때는 진출의 시기가 뒤늦어 실패한 셈이다. 이는 북한과 중국·베트남 등 남아 있는 또 하나의 결전장을 앞두고 우리에게는 소중한 실패다』<글 이철호 특파원|사진 장남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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