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르트헤이트의 종언(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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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근대 문명사회에서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어야 할 가장 부끄러운 제도가 이제 사라지려 하고 있다. 백색인종 우월주의를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국가제도의 바탕으로 삼아 유색인종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독점해 왔던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이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정책)의 철폐를 지지한 것이다.
백인들만이 참여한 국민투표에 따른 이 결정으로 온갖 인간적 모멸과 불평등 대우를 받으며 살아온 유색인종들도 권력을 나누어 갖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이는 그동안 핍박받아온 흑인들이 아파르트헤이트에서 해방되었음을 뜻할 뿐 아니라 모든 남아공 국민들이 해방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아울러 인류양심의 승리이기도 하다.
3백여년전 유럽사람들의 남아프리카 이주로 시작된 이 나라에서의 인종차별정책이 제도화된 것은 1948년이었다. 바로 지금 이의 철폐를 주도하고 있는 국민당이 집권하면서 입법된 것이었다.
이 법률에 따라 흑인뿐 아니라 백인이 아닌 모든 인종은 한등급 낮은 하류인간으로 다루어졌다. 참정권이 없는 것은 물론,주거지역도 제한받고 대중교통수단에서 출입구를 따로 사용해야 했다. 여행중인 외국방문자들도 백인이 아니면 차별의 대상이 될만큼 지독한 법률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단계적으로 완화되기는 했으나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색인의 기본적인 권리는 극도로 제한받아 왔다. 그동안 표면적으로 사회적·경제적 차별법률들이 완화되기는 했으나 참정권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3천만명이 넘는 인구중 20%가량의 백인들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지배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5%의 백인이 국가 부의 9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어 흑인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정부군·경찰과 흑인사이에 유혈충돌이 그치지 않아 지난해 희생된 인명만 해도 4천명에 이른다.
이런 상황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결국 참담한 종말 밖에 없으리라는 인식에서 정부와 흑인을 대표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사이에 타협이 모색되어 왔다. 특히 2년전 드 클레르크 대통령이 취임한후 정부쪽에서 흑백공존을 위한 권력의 공유를 포함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남아프리카는 극적인 전환기를 맞게 됐다.
당시 그의 권력공유선언은 남아공에서는 마치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만큼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만큼 백인들로서는 선택하기 힘든 결단이었다. 당시 클레르크 대통령은 공산주의 해체와 때맞추어 「새로운 시대정신」에 뒤떨어져서는 안된다고 백인들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국민투표에서 백인들이 흔쾌히 아파르트헤이트 폐기에 찬성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암울한 앞날 밖에 없는 절망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가 문제다. 올해안으로 흑인이 참여하는 과도정부의 구성이 예상되고 있으나 헌법제정,의회구성,경제배분제도 문제 등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미 가장 큰 난관이 제거된 만큼 평화공존의 길이 멀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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