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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면장 받은 한상훈 왕위전 4강 '초단들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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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2006년 입단대회를 통과한 새내기들에 대한 면장 수여식이 11일 한국기원에서 있었다. 지난해 모두 9명이 지옥문이라 일컬어지는 입단대회를 통과했는데 그중 하반기에 입단한 남자 4명과 여자 1명 등 5명이 이번에 면장을 받고 정식 프로가 됐다. 왼쪽부터 조경호.윤찬희.박지연.한상훈.김승재 초단.[한국기원 제공]

스타트 라인에 섰던 198명 중 4명이 남았다. 창검이 번득이는 험난한 토너먼트의 숲에서 이세돌.최철한.조훈현.유창혁.조한승.박정상.안조영.목진석.이영구.강동윤 등 기라성 같은 강자들이 허망하게 쓰러져갔다. 살아남은 4명의 얼굴은 그래서 약간 생소하다. 기성 3연패에 성공한 박영훈 9단과 당당 국수의 반열에 오른 윤준상 6단은 바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이성재 8단은 이미 7년 전에 이름을 날린 뒤 잊혀졌던 인물이고 또 한 사람 한상훈 초단은 프로생활이 고작 3개월째인 햇병아리 중의 햇병아리다. 한상훈은 특히 프로 허가증이라 할 '면장'을 받기도 전에(한상훈은 11일에야 면장을 받았다) 4강에 오르며 왕위전의 '초단 돌풍'을 주도했다.

이성재는 윤준상과, 한상훈은 박영훈과 각각 4강전에서 맞서는데 어딘지 중량감이 맞지 않아 보이는 이들 4명의 모습이야말로 강자는 분명 존재하지만 어느 누구도 약하지 않은 춘추전국시대의 한국 바둑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11일 열린 41기 KT배 왕위전 8강전에서 박영훈 9단이 허영호 5단을 불계로 꺾고 4강에 합류했다. 그러나 최철한 9단은 복병 이성재 8단에게 3집반 차로 덜미를 잡히며 기성전에 이어 또다시 뼈아픈 패배를 겪었다. 이 대회 나흘 전에 벌어진 기성전 결승에서 박영훈 9단은 최철한 9단을 격파하고 우승컵을 차지했는데 그때의 명암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왕위전에서 5연승 가도를 달리며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이성재 8단은 23세 때인 7년 전, 패왕전에서 도전자가 되어 조훈현 9단과 일진일퇴했던 유망주였다. 조치훈 9단의 조카로 조남철 바둑일문의 한 사람인 이성재는 힘이 장사였고 정상 진입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군 입대와 함께 그의 이름은 잊혀졌다. 제대를 했으나 후진들이 물밀듯이 치고들어온 바둑계에서 그의 자리는 사라진 듯 보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칼날을 가다듬어온 이성재는 올해 왕위전 무대에서 다시금 옛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특히 11일 최철한 9단과의 대국에선 초반부터 최철한의 강펀치를 강펀치로 요리하며 시종일관 우세를 지키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올해 KT배 왕위전의 진짜 별미(?)는 초단들의 신선한 반란이다. 특히 한상훈 초단이란 존재 때문에 왕위전은 시간이 갈수록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다. 한상훈은 6일 벌어진 8강전에서 천원전 우승자 조한승 9단을 제물로 삼아 5연승을 질주했다. 올해 충암고를 졸업한 그는 지난해 12월 막차로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88년생으로 만 18세였던 한상훈은 입단이 하도 어려워 하마터면 프 로생활을 해보지도 못하고 바둑 인생을 접을 뻔했다(한국기원은 만 18세까지 입단하지 못하면 연구생을 떠나야 한다).

간신히 자격을 얻은 한상훈은 올 3월부터 대회 출전을 시작했고 이후 12승1패 92%의 고감도 승률로 전체 프로기사 중 승률 1위를 달리고 있다.

한상훈 초단, 박승화 초단 등과 함께 왕위전에서 또 한 명의 무서운 초단으로 모습을 드러낸 윤찬희 초단은 8강전에서 윤준상 6단과 마주앉았으나 최근 국수의 반열에 오른 윤준상의 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윤찬희는 송태곤 8단, 이영구 6단, 목진석 9단 등 현역 최강자들을 연파하며 바둑계를 강타하고 있는 '초단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바꾸어 말하면 국수 윤준상이 초단에게 무릎을 꿇는 불명예를 간신히 모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강전은 5월 8일 한국기원에서 열린다. 박영훈 대 한상훈의 대결에선 박영훈이, 윤준상과 이성재의 대결에선 윤준상이 일단 우세한 것은 틀림없지만 약자가 없는 바둑계의 현주소를 돌아볼 때 정작 누가 누구의 칼에 맞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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