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혁명은 불가능한가/이상우(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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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금은 혁명이 필요한 시기다. 혁명을 거치지 않고는 오늘 우리가 겪고있는 정치적 혼란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다.
한 사회가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할때,그리고 그 사회가 생명력을 잃고 허덕일때라든가 정치지도자가 지도역량을 잃었을때,그래서 국민 모두가 불만이 가득할때에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과 새로운 지도력을 창출해야 그 사회는 되살아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바로 그러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구태의연한 정치판
바깥세상은 혁명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는데도 나라 안에서는 구태의연한 소리들만 하고 앉아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선 지금 이 마당에 1960년대의 정치판을 그대로 벌이고 앉아있다.
대학생이 8만명이던 1960년대에는 고등학교만 마친 사람도 우리사회에서는 국회의원을 해도 손색이 없었다.
대학출신자가 수백만명이 된 지금에 와서도 대학수준의 특수학교를 마쳤다고 자기들만이 엘리트연한다면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맹자가 많아 기호를 그려 투표하던 시절에는 고무신 나누어주고 표를 얻을 수도 있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돈으로 국회의원직을 사려고 하는가. 보릿고개에 배고파 허덕이던 사람들이 대부분일때 배불리 먹게해 주겠다고 황당한 공약을 내걸고 유권자를 속일 수 있었지만 1인당 국민총생산액이 미국은 6천달러에 이르렀는데도 똑같은 방법으로 국민을 속이려는 정당들이 판을 친다면 한심해서 할말이 없다. 전국구 의원직을 돈받고 팔고,지연·학연·혈연을 따져 나누어 주는 정당이 국민들에게 지원해달라고 나서는 판에 유권자들은 분노마저 느낀다.
민주정치는 정당정치다. 정당의 색깔을 보고 국민들이 투표하고,정당들은 그 투표결과를 보고 자기들의 정강정책의 옳고 그름을 알아 국민의 뜻을 따르는 정치를 한다. 그런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근대적인 정당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중심으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민주적으로 당을 운영하는 곳이 있는가.
○지적 파괴력의 위력
한결같이 선거를 위해 지도자 한사람밑에 모여든 집단뿐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는 유권자가 고를 당도 찾을 수 없고,또한 정치지망생이 당을 찾아 들어갈 곳도 없다. 새시대에 맞는 정당정치를 시작하기 위한 혁명적 결단이 있어야 할 때가 되었다.
레닌은 혁명에는 두가지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텔리의 지적 파괴력과 대중의 물리적 파괴력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폭력혁명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온 세계가 문명화된 20세기 말에 와서 폭력혁명을 논한다는 것은 시대착오다. 폭력혁명의 부작용을 감당하려는 우둔한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국민이 모두 깨인 민주사회에서는 지적 파괴력만으로도 혁명은 가능하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일당지배의 전제주의도 비폭력혁명으로 뒤엎지 않았는가. 소련이 해낸 일을 한국이 못할리 없다.
이 나라의 배운사람들,지식인들이 뜻을 모으면 30년이나 뒤쳐진 우리의 정치체제를 시대에 맞도록 뜯어고칠 수 있다. 국민을 설득해 한뜻으로 묶을수만 있다면 시대착오적인 낡은 정치인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비전을 제시하고,여론을 환기시키고,설득을 통해 국민의 동조를 얻어내면 그 힘을 누가 꺾겠는가.
오늘 우리정치가 이 지경으로 전락한데는 이나라 지식인들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한다. 냉소주의·안일무사주의·실리주의에 젖어 남의 일처럼 정치인들을 나무라는데 바빴지,정작 이 나라가 나가야 할 길에 대해 혼을 쏟아 외친 적이 있는가. 깊이 자성할 일이다.
민주주의사회에서 비폭력혁명을 가장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길은 선거를 바로 하는 일이다. 언론인·학자·예술인 등 이나라의 모든 지식인들이 나서서 국민의 뜻을 하나로 모은다면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의 혁명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당의 색깔차이도 뚜렷하지 않고 정강정책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결국 총선이후의 대폭적 정당재편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당선된 의원들을 이리저리 모아 과반수를 만든 정당이 여당이 될 것이고 그 다음이 대표야당이 될 것이다. 이런 전제라면 정당이 아니라 사람을 골라 투표해야한다.
○인물보고 투표해야
유권자들은 후보의 국회의원 자격시험을 치는 시험관과 같은 자세로 각 후보의 자격을 면밀히 검토해 무자격자가 다시 국회로 들어오는 길을 막아야한다.
새시대 감각을 못갖춘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탈락시켜야 한다. 30년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낡은 정치인은 물러나게해야 한다. 나라의 앞길을 제시할 수 없는 사람도 제외시켜야 한다.
분명한 비전을 제시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도자가 되겠는가. 소신없는 철새같은 기회주의자도 걸러내야 한다. 자기의 신념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사람이 누구를 이끌겠는가. 더구나 돈으로 표를 얻을 생각을 하는 후보는 망신을 주어야 한다. 나라의 망신을 피하려면 이런 후안무치의 사이비정치인들이 정치판에 끼어들 자리를 주지 말아야 한다.
선거는 비폭력혁명이 될 수 있다. 냉소주의를 떨쳐버리고 진지하게 투표에 나서자.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서강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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