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밀고 당기는 425일간의 줄다리기가 끝났다. 이른바 진보 진영은 일치단결해 FTA를 비난했다. 하지만 보수라는 한나라당의 반응은 어정쩡했다. 대선 때 농민 표를 생각해 그랬을 것이다. 그날 저녁 우리 국회의원들은 헌정사에 남을 만한 투표를 했다. 정부의 국민연금법개정안은 부결시키고, 그 법안에 붙어 있던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시켰다. 약이 써 당의정(糖衣錠)으로 만들었더니 달콤한 껍데기만 벗겨 먹은 셈이다. 물론 노인 표를 노린 여야 담합이었다.
6일에는 인천 송도 국제도시의 오피스텔 '더 프라우' 청약신청이 마감됐다. 방은 123개가 나왔는데 36만 명이 몰렸다. 경쟁률 '4855 대 1'. 아마 세계신기록이었거나 그 언저리쯤 될 것이다.
교육도 가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8일 "3불정책(본고사.기여입학제.고교 등급제 금지)을 잘 방어하지 못하면 진짜 우리 교육의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짜 교육의 위기? 혹시 대통령은 잠깐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학부모.아이들을 반 죽이고 교육부 관료들과 사교육 시장만 폼 잡게 하는 우리 교육 시스템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엉망진창이란 걸 말이다.
불과 열흘 사이에 이 모든 문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터져나왔다. 어찌 보면 우연의 일치다. 하지만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젠 모든 게 곪을 대로 곪았고 갈 데까지 간 것이다. 활주로를 뱅뱅 돌던 '한국호'가 하늘로 치솟을지, 아니면 그냥 비행을 접어야 할지를 결정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잘됐다.
국가 경쟁력 높일 생각은 하지 않고 3불이네, 아니네 하며 대통령까지 개입해 제도 논쟁만 벌이면 어떻게 될까. 답은 '망한다'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국민연금.공무원연금을 지금처럼 방치하면 나라 살림이 머잖아 거덜날 게 뻔하다. 부동산? 전 국민을 투기꾼으로 만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 통합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한.미 FTA는 장래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으니 더 이상 회색지대에 숨어 있지 말고 눈치 좀 그만 보고, 커밍 아웃을 하시라.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밝히고 할 말은 하란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 이장무 총장의 9일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3불정책을 포함한 대학 자율권 문제를 더 개방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3불정책 고수를 선언한 다음 날 이런 얘기를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승주 고려대 총장서리도 10일 "틀린 것은 틀렸다고, 옳은 것은 옳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며 3불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두 총장의 용기 있는 발언을 환영한다. 이젠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더 존중받고, 평가받는 나라가 돼야 한다. 중국 문화혁명 때처럼 권력을 잡은 아마추어들이 전문가들을 욕보이고 세상을 재단(裁斷)하게 해선 안 된다.
올해 대선이 치러진다. 새판을 짜는 해다. 하지만 정치권만 판을 새로 짜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권력이 노 대통령으로부터 또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새판을 짜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이 되는 게 가능해진다.
1980년대식 낡은 제도와 운동권적 사고방식으론 더 이상 한국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허물을 벗어던질 때가 이미 지났다. 부동산이든, 교육이든, 아니면 연금이든 FTA든 간에 모두 할 말을 하면서 대책을 찾아보자. '한국호'를 격납고에 처박아 버리지 않으려면.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