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임해봉 기보 분석에 조훈현 9단 초빙 해설 "법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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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국이 세계 프로기전을 휩쓸자 크게 자극 받은 일본은 대책 마련에 법석이다. NHK-TV를 통해 이창호 5단-임해봉 9단간의 동양증권배 기보를 집중 분석하면서 이 5단의 스승 조훈현 9단을 해설자로 초빙하여 한수 배우는 자세를 취하기도. 외국기사를 일본으로 모셔다가 TV해설을 시킨 것은 일본 바둑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일본 기원 발행 「주간 기」의 제목이 재미있다. 임 9단이 이 5단을 막판으로 몰아 넣고 제4국에서 필승지세를 노래할 때만 해도 천국에서 노니는 입장이었으나 4국에 이어 5국마저 다 이겼던 바둑을 역전패 당함으로써 이야말로 지옥으로 떨어진 격이라는 표현이다.
『10대나 20대에는 시간을 끌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수가 잘 보이는데 비해 40대 이후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뇌 속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법』이라는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선생의 명언처럼 임 9단은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자멸하였음이니 빈틈없는 절제로 체력 관리를 잘하고 있는 그로서도 50이 넘은 나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일본인들은 참으로 간특하다. 지난해 6월 북경에서 열렸던 후지쓰배 8강전 때도 규칙문제를 놓고 한국기원을 충동질하더니 이번에는 『응창기씨에게 항의를 해달라』고 요청, 한국기원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제2회 응창기배」 준비를 위한 지난해 10월의 각국 대표자 회의 때나 지금이나 자기들은 공식적으로 반대나 항의를 하지 않으면서 한국을 앞장세워 시끄럽게 만들려는 저의가 의심스럽다. 4년 전 응창기배 탄생이 발표되자 부랴부랴 후지쓰배를 급조, 먼저 세계프로기전을 개최하여 바둑 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일본이다.
쟁점으로 등장한 초읽기 문제도 참가 선수 모두에게 동등한 조건이라면 스폰서의 의사를 존중해준들 해로울 게 없다.
요는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차지하는 (사소취대)」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4년 전 응창기배전의 열기로 모처럼 바둑 붐이 일어나고 조 9단이 40만달러의 우승상금을 획득, 세계 바둑황제로 등극했던 그 감격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조남철·조훈현 두 9단이 은관 문화훈장을 받은 것 또한 응창기배 덕분이다.
과거 한·중간의 대화 채널이 없던 시절 「한·중 바둑 류」의 다리를 놔줄 것을 부탁하면 일본인들은 『염려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싹싹하게 승낙하고는 돌아서면 딴 짓을 했던 것. 훗날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교류의 물꼬를 트고 나서 비로소 진상을 확인, 분노했던 뼈저린 경험을 상기할 때 한국 기원은 일본의 농간을 경계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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