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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 문화공간을…장세양(건축가·공간사 대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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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눈, 또는 비라도 마구 쏟아지는 날. 복잡한 지하철에서 빠져 나와 질퍽거리며 직장으로, 집으로, 학교로 가야 하는 유쾌하지 않은 일상을 현대의 도시인들은 수시로 되풀이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삭막한 현실에서 벗어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갈망하게 된다. 그런 꿈을 어디에,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서울 같은 인구과밀 도시에서는 땅위에서 그 해답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시민들의 생활을 좀더 풍요롭게 살찌울 수 있는 방법을 땅속, 즉 지하철에서 찾아봄직 하다. 서울시내를 거미줄처럼 연결해가고 있는 지하철의 광장들(예컨대 시청∼광화문∼중앙청, 광화문∼종로∼동대문, 시청∼을지로∼동대문운동장)곳곳을 지하문화의 거리로 재구성한다면 서울은 입체적인 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의 서울을 생각해보자. 지하철이 8호선까지 완공돼 개통될 것이다. 그때의 경제적 수준에 맞는 문화생활을 뒷 받침하기 위해 지하철 역사와 역사를 잇는 공간마다 각각 특색을 살려 근사한 문화의 거리로 만들면 어떨까.
다양한 문화공간과 함께 휴식공간도 갖추면 더욱 좋겠다.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사의 전시공간처럼 적절한 문화공간들을 곳곳에 만들어 활용한다면, 우선 현재와 같은 공연·전시 공간 부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하철은 수많은 학생과시민들이 두루 이용하는 만큼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가 아니라 아늑하고 밝은 만남의 장소로 꾸며 누구나 차 한잔 들며 하루의 피로를 씻을 수 있도록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이처럼 방치되기 십상인 지하공간을 항상 음악·무용·연극이 공연되고 미술전시회가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살려낸다면 시민들의 생활은 얼마나 더 윤택해질까. 시간에 쫓기는 시민들이 일부러 공연장을 찾아 나서지 않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문화생활을 즐기며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우리 청소년들이 「뉴키즈 온 더 블록」내한공연 때 같은 민망한 소동도 더 이상 부리지 않게 될 터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당국은 지하문화공간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미래도시건설의 돌파구가 바로 땅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제라도 「지하도시」에 대한 장기계획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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