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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불 오가며 미사일 기술 익혀 시험 발사 땐 30km 날아가다 실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시일이 흐르면서 군 수뇌부에서 아무래도 이상했던지 대학에서 물리학 등을 전공한 우리를 오카다의 조수격으로 파견해 진상을 알아보게 했지요. 그래서 허풍이 들통 났습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는 축전지 공장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카다의 기술을 채용해 진해에 최초의 공장이 53년에 세워졌어요. 주로 미군이 쓰다 남은 배터리를 재생해 국내수요를 충당했습니다. 이런 사연도 있고 해서인지 아직도 상당수 관계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핵 개발에 대해서도 『일부 들뜬 과학자들이 쓸데없이 대통령을 부추겨 일을 저지르려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박대통령 때도 「수천만 달러만 들이면 몇 년 내에 핵 폭탄을 만들어 보이겠다」는 사기에 가까운 호언장담을 한 이도 있었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아파트서 밀실기획>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박대통령 때는 누구보다 대통령 자신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핵무기개발을 추진했던 것이 확실하다. 70년대 초에 시작된 국산 미사일개발도 북한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측면 외에 핵탄두 운반체로서의 기능도 염두에 둔 것 같다. 물론 연구를 담당한 실무자선에서는 핵 개발의 경우 핵 주기 기술의 확립을, 유도탄의 경우미제에 버금가는 제품의 개발을 목표 삼는 식으로 프로젝트 자체에만 몰두했었다.
당시의 미사일 개발작업은 「항공 공업사업」이라는 의장명칭으로 불렸다.
이 사업의 실무책임자였던 이경서박사(현 국제화재해상 보험사장)의 증언.
『72년 초에 국방과학연구소와 공군·해군의 핵심연구진 4명이 모여 국산 유도탄개발을 기획했어요. 한강변의 한 아파트를 빌려 작업을 했는데 기획작업만도 2년이 걸렸습니다. 박대통령의 계획서 승인·사업추진지시가 떨어진 것이 74중반께 였지요. 「단거리 미사일은 수입해서 쓰면 된다. 중장거리를 개발하라」는 지시도 내려왔어요. 미국이 이것을 알고 엄청나게 반대를 하더군요. 그때 우리군에는 나이키 지대 공 미사일이 있었는데 그 부품공급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명분을 대고 일단 연구를 시작했지요. 나이키가 지대 공이긴 하지만 지대지로 개량이 가능하다는데 착안한 겁니다,
국산 미사일개발에 미국이 반대한 데는 핵탄두 운반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과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용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 연구진은 이 때문에 방어용(지대 공)미사일을 국산화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미사일의 1차 목표는 평양, 2차 목표는 휴전선부근의 북한군 비행장들이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던 프로그·스틱스 미사일등 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 이즈음 인도네시아에서 소련제 스틱스미사일을 극비리에 들여와 분해, 성능시험을 한 적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북한이 프로그 미사일로 서울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나, 서해안의 백령도가 점령당할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두 경우 다 뾰족한 방법이 없었지요. 가장 나은 대안으로 떠오른 게 미사일 개발이었어요. 미사일 제조는 다른 무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연구진은 미국·영국·프랑스를 마치 곡예 하듯 오가며 추진제와 미사일본체 제조기술을 얻어냈다. 미국이 기술이전을 거절한 추진제 제조방법은 프랑스에서 값싸게 배워왔다. 때마침 미국 록히드사 계열의 추진제 공장이 파산했다는 정보를 알고 미국으로 날아가 교섭을 벌인 결과 공장전체를 통째로 뜯어 한국에 옮겨 올 수 있었다.

<참사 빚을까 초긴장>
나이키 미사일의 주 설계회사인 맥도널더글러스사와는 총2천만달러규모의 유도탄 설계용역계약을 한 뒤 양쪽 기술진이 6개월간 함께 예비설계 작업을 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미국 정부가 「기술이전 부가」결정을 내렸는데 이미 예비설계(2백만달러 규모)단계를 마친 우리 기술진에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유도탄 설계기술은 이미 웬만큼 습득한 마당이라 계약취소로 예산만 절약됐던 것이다. 영국의 한 회사에서는 관성유도장치 제작기술을 습득했다.
4년여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78년2월부터 9월까지 일금차례의 시험발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난관이 생겼다. 이경서씨의 말.
『분명히 제대로 만들었는데도 실험이 계속 실패했어요. 처음에 쏜 것은 바다로 1백km가량 날아가다 레이더에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것도 20∼30km날아가다 실종됐지요. 우리 연구팀은 실험의 실패도 실패지만 없어진 미사일이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지요. 혹시 민가에라도 떨어지면 그야말로 대형참사를 빚을 판이었으니까요. 발사 후 서너 시간 동안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군부대·경찰 등 부근의 치안 망을 총동원해서 폭발사고소식이 들어오지 않나 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기했어요. 다행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사일의 유도조종에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원인이 판명돼 수정했다. 그런데 박대통령이 참석하는 시사회를 며칠 앞두고서는 지상에서 미사일의 이동을 추격하는 레이더의 스코프에 또 이상이 생겨 연구팀이 발칵 뒤집혔다. 발사대에 고정해둔 미사일이 레이더에는 빙글빙글 옮겨다니는 식으로 표시되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전자파의 반사과정에 잘못이 있는가 생각해서 시험장의 바닷가 절벽에 기름을 붓기도 하고 불을 질러보기도 했다. 이것도 미사일의 전자파발생장치를 조절함으로써 가까스로 해결했다.

<핵 자립 계획 본격화>
78년9월26일.
서해안 지역 한 바닷가에서 「백곰」이라고 이름지어진 국산미사일의 발사시범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눈앞에서 해 보인 발사시험은 대성공이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미사일 보유국이 된 날이었다.
미국은 이 실험성공을 핵무기개발의 한 단계로 간주하고 바싹 긴장했다. 미사일 개발의 산실이었던 중부지역의 우리기계창 상공은 엄연한 비행금지구역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비행기가 수시로 날아와 저공비행을 하며 항공촬영을 해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즈음 박대통령은 70년대 중반기에 좌절됐던 중 수노4기의 건설 등 본격적인 핵 자립계획을 착착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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