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이공계 찬밥, 교수들도 책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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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올해의 대학 입학에서도 학생들이 이공계를 외면하고 의.치대로 몰리는 현상은 개선될 것 같지 않다. 지난 수년간 정부는 우수한 이공계 신입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졸업하면 공직에 나갈 기회를 확대해 준다는 등의 당근을 내놓았지만, 아직은 큰 효과가 없는 듯하다. 사실 서울대의 이공계열 입시설명회는 썰렁하게 끝난 반면 사설 입시기관이 실시한 의.치대의 입학설명회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이제는 '학교'의 서열화보다 '학과'의 서열화가 더욱 문제라고 한탄하는 교수들도 많다. 과거에는 돈벌이가 안 되는 기초학문 계열의 학과라도 소위 명문대에서는 그런 대로 학생을 유치해 국가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인력은 양성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것마저 어려워지는 모양이다.

*** 학교 서열화가 학과 서열화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의 꿈이 없음을 탓하기도 한다. 과거에도 돈벌이로 보면 의사나 변호사가 좋았지만 기술입국이나 위대한 학자로의 야망을 갖고 이공계나 기초학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처럼 꿈을 좇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적어졌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 보상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거론하기도 한다. 이공계 전공자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신제품을 개발하고 생산.수출해 부(富)를 창출하면, 그 과실을 챙기는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기술자들이 아니라 권력이나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라는 불만이다. 물론 이러한 불만들에 일말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겠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으나, 불평이나 거대 담론만을 논하기에는 당면한 위기가 너무 급하기에 좀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최근 미국의 물리학회가 발표한 한 연구 결과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어 우리 나름대로 곱씹어볼 만하다. 미국에서도 이공계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줄고 있어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학생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물리학과들이 있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본 보고서가 출간된 것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학생 유치에 성공적인 학과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학생들에 대한 학업과 진로 상담제도가 매우 활발하다는 점이다. 신입생 때부터 전공에 관련된 직업에 대해 친절히 소개해주고, 졸업이 임박하면 대학원 진학을 도와주거나 기업체와 연결해 주는 등 학생들의 진로 개발에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며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현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전문대학들이 졸업생 취업률도 높고 입학 지원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결국 학교에서 학생들의 장래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도움을 주느냐가 학생 유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둘째는 원칙에 충실한 교과 과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공계 공부가 어려워 학생들이 기피한다는 속설과는 반대로, 소위 잘 나가는 물리학과들은 교과내용의 수준을 낮추거나 후한 학점으로 학생들의 인심을 얻어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철저한 학사관리를 통해 졸업생들의 질(質)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 교수들이 교육여건 개선 고민을

이와 더불어 학생 유치에 성공적인 학과라고 해서 장학금이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라는 조사 결과는 '돈'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셋째로는 학과 혹은 대학 전체의 집단적인 노력이 필수라는 사실이다. 교수 한두명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새로운 교과과정을 개발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과 전체가 협력하고 공동으로 노력하는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학생 지원 프로그램들이 일관성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어 장기적인 성공이 담보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 교수들은 이러한 노력에 얼마나 동참하고 있을까. 과거 양적 팽창만 추구하다 교육 여건의 개선이나 충실한 학생지도 등의 원칙에 철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