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초대시조-그(백이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젊어 한때는 예리한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은 짚차가 왕자의 배를
깔아뭉개도
웃으며 짙은 눈썹만
꿈틀하고 말던 사내.
스파이 영화에라도
가끔씩 팔릴 때면
자기의 현존을
실루엣으로 대신하며
언젠간 히어로가 되리라
대망을 품던 사내.
장년이 바뀌면서는 점차
밀매꾼이 뇌거나
독심술을 흉내내는 서툰
교주 노릇에다
슬며시 정적의 등 뒤로
단검을 날리던 사내.
세계를 삼키겠노라
배포는 컸지만
우선은 일번가 보스라도
되고 싶던
그 사내, 떠돌이 차력사
혹은 엑스트라 김.

<시작메모>
누구나 주인공을 꿈꾸지만, 누구나 엑스트라를 꿈꾸지는 않는다. 누구나 주인공은 되지만 누구나 엑스트라가 되지는 못한다.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빛나는 엑스트라. 엑스트라는 주인공을 완성하기 위하여 있다. 아니 주인공은 엑스트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있다. 원둘레를 그리는 것은 엑스트라일 뿐. 중심에서 멀리 달아날수록 더 큰 원을 그리는 그의 주인공은 무대 중심에 굳건히 못박혀 있다.
◇약력
▲55년 서울출생
▲1977년 월간<시문학>추천완료로 등단
▲시집으로<나무 위의 집>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