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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고언에 답할 것인가/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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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공화국과 5공화국 당시의 핵심 관료들이 지금에 와서 몹시 안타까워 하는게 있다. 과거 주요 정책에 얽힌 숱한 메모들을 남기지 않았거나 아예 태워버린데 대한 서운함이 뼈에 사무친단다.
정권이 내세운 하고많은 공약들의 탄생과 소멸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밝혀야하고 주요 정책 뒤에 깔린 내밀한 이야기들을 끌어내어 도대체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해서 말하는 사람마다 「그 정책은 사실 이렇게 된 것이오」하고 백인백색의 설명을 첨가하는 지경이 됐다.
○남덕우씨 용기 주목
말 한번 잘못해 미운털 박힌 사람들도 많고 무슨 무슨 연유로 닦달 당해 각종 기록을 조사받는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던 그 시절에는 「메모」란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래서 통치행위에 거슬리는 언짢은 일들은 구두로 속마음이 전달됐고 조금치라도 그 흔적이 남는 메모는 일일이 소각되었다. 관계·학계 뿐만 아니라 정부기관,하다못해 중앙은행의 연구원들조차 필화사건에 몰리고 어떤 이는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정밀한 자료로 활용될만한게 없었고 그래서 이 시대를 대변할만한 몇몇 지성인들은 이제 그들의 경륜을 펴는데 몹시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이는 『언젠가는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절실한 욕망을 일깨우고 어떤이는 『이것만은 꼭 말하고 넘어가야겠다』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흔들리고 사회에서 질서의 틀이 붕괴되며 정치에서 통치권자의 위상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대해 고뇌하는 지성들은 의외로 많다.
최근에 남덕우 전 총리나 박봉환 전 동자부장관의 거침없는 고언은 「꽝」하고 우리들의 머리를 내리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다부진 말들은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반체제 인사들도 아니며 정치권력을 노리는 당권파도 아니었다.
「내가 입을 열면 끝장난다」고 한 전 안기부장이나 정치인으로 변신한 기업총수 또는 탤런트와 같은 「말의 공포」를 터뜨린 것도 아니다.
양씨는 몇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남씨는 학계에 있다가 지난 20년동안,박씨는 전통경제관료로 60년대부터 30년동안 각각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우는 뛰어난 이론무장과 설득력을 지녔다. 현실적 원칙론자라는 점에서도 두사람 모두 다름이 없다.
박씨는 작년말 국방대학원에서 가진 「현대사회와 국가경영」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남씨는 2월에 「한국 오늘의 위상과 기업인의 사명」에 관한 경영자 연찬회에서 첫째로 『정치지도층은 반복되는 선거전이라는 구조적 요청때문에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정치적 영향 때문에 행정안정과 능률이 파괴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양씨는 여론재판 때문에 법이 밀리고 있으며 일단 제정된 법령·제도·정책은 반드시 집행돼야 하며 그걸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무능한 정부가 아니냐고 비판했다.
○여론재판 눈치보기
셋째,정부가 국민·기업에 안겨주는 최대의 불안은 불확실성이라는 지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박씨는 최적자론을 내세운다. 능력있는 사람이 그에 상응한 자리에 앉아 정책을 다루어야 한다. 국민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사람,예측가능성을 줄 수 있는 사람,국민장래에 희망을 안겨줄만한 최적자가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그는 감히 주장했다.
남씨는 이 「난국」을 헤쳐가는데 최고통치자의 확고한 경륜과 지도력을 요구했다.
박씨는 지도자에게 「임원」이란 덕목을 추가했다. 각 집단간에 이해의 대립이 격화되는 시대에는 지도자가 욕을 먹어가면서도 할일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싫은 소리 듣기를 꺼려하거나 원망받을 일을 맡아 처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겠느냐는 따가운 질책이다.
일부 식자들은 양씨가 과거 정부에 몸담고 있을때 그같은 시각에 걸맞은 행동을 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의 정치적 굴레에서도 그들은 소관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일관성을 갖춘 정책을 소신있게 밀어붙였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난에서 양씨의 강연내용을 새삼 인용하는 것은 「국가경영을 위한 건전한 비판」에 나서는 그들의 용기를 지나쳐서는 안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은 3공에서 6공 중반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그 외곽단체에서 열심히 일해왔다. 그런만큼 현 정부에 대한 그들의 고언은 실행하기가 더욱 어렵고 또 값진 것이다.
과거처럼 정책수행 과정을 기록한 메모를 태워버리는 시대는 지났다.
○소신있는 관료없나
힘들여 쌓아온 경륜을 망각속으로 보내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나라가 어려울때일수록,당리당략으로 세상이 시끌벅적 할수록 전문관료들은 그들의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적절할 시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최근 정년퇴직한 어느 노경제학교수는 『건달 정치인들이 이 나라를 지능이 떨어진 국가로 만들었다』며 정계의 일대 개혁을 촉구했다.
정부를 위해 마땅히 비판할 수 있는 지성인들이 침묵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경제하는 사람들이 그저 정치걱정으로 날이 지고 새는 이 현실은 더 비극적이지 않은가.<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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