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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과공비례<過恭非禮>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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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극심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곳은 정치권과 이념지향적 시민단체, 그리고 언론이다.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 하는 이분법적 이념 잣대에 익숙해 있던 이들에게 한.미 FTA 타결 소식은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진보나 좌파는 인기 없는 노무현 대통령과 거리를 둔 지 꽤 됐기에 상대적으로 충격이 적었다. 정작 당황스러워 하는 곳은 보수세력이다.

그래서인지 FTA를 타결한 노 대통령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지나친 감이 있다. 이는 현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인사들의 발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념지표상 현역 의원 중 가장 우측에 있는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 "경제의 6.29선언"이라며 극찬했고, 현 정권을 초기부터 거칠게 공격했던 조갑제씨는 이례적으로 "노 대통령과 같은 저항과 도전 정신의 소유자는 기득권자와 싸울 때 초인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평가했다. 탄핵 사태의 주역인 민주당 조순형 의원조차 "협상 타결 과정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소신과 결단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치켜세웠다. 자신의 지지층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마침내 FTA를 이끌어낸 노 대통령의 리더십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노 대통령이 뒤늦게나마 경제와 개방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비판과 칭찬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구국의 결단'이니 '영웅'이니 극찬하는 것은 낯 뜨겁다.

왜 이렇게 '오버'하는 것일까. 부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노 대통령을 '좌파'라고 몰아붙이고,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추진할 의사가 없으며, 대선을 앞두고 지지세력을 'FTA 반대 전선'으로 재결집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의심한 것이 쑥스러워서 그럴 것이다. FTA를 밀어붙인 대통령을 좌파라고 우기기에는 논리가 맞지 않고, FTA 협상이 타결된 마당에 계속 음모론을 고집하기도 어려워서 그럴 것이다. 용돈 낭비가 심하다며 아이를 야단쳤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도와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의 부모의 심정이랄까. 민망함과 기특함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과잉 칭찬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아무리 그렇다 해도 칭찬에 앞서 오해한 데 대한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또 하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다. FTA에 대한 지나친 맹신이다. FTA 체결로 저절로 수출이 늘어나고 우리나라가 단숨에 선진국이 되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 왜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듯한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는가. 물론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언론에도 있다. 오죽하면 청와대가 "일부 언론의 태도에 어리둥절하다"고 했겠는가.

이제 뒤쫓아 오는 중국을 따돌리고 일본을 따라잡을 도구 하나를 우리 손에 쥐게 됐을 따름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 4만 달러 시대로 도약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았을 뿐이다. 한눈팔면 다리 위에서 떨어진다. 기업과 국민과 정부가 경쟁력을 키우지 못하면 성장은커녕 미국 경제에 예속될 우려도 있다. 한.미 FTA는 잘 쓰면 약이요 잘못 쓰면 독이다.

축하와 칭찬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아니 넘쳤다. 그것이 반대세력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한 전략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한.미 FTA는 '양날의 칼'이란 사실을 정확히 알리고, 그 칼을 어떻게 국익에 맞게 쓸 것인지에 온 힘을 쏟아야 할 때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