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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을사조약」막아야 한다(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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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종군위안부는 한국이 인정하던 공창제의 일부다」「8억달러로 36년의 식민지지배 문제는 매듭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군위안부의 보상도 본래 한국정부가 해야 하는 것이다」「코리안은 북쪽도 남쪽도 언제까지 과거를 강매하는 장사를 하려는 것인가」「일제 36년을 방패로 테이블을 때리고 큰소리를 치면 일본은 사죄,양보한다는 테크닉을 한국측은 지니게 됐다」.
최근 발간된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월간지 『문예춘추』와 그 자매지인 『제군』이 전하고 있는 일본보수지식인들의 목소리는 이렇듯 한껏 높아져있다. 정신대에 관한 증거자료가 속속 발굴되고 있음에도 자괴나 반성은 커녕 한국측의 요구에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노골적인 「염한」「혐한」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일 잡지의 잇단 억지
과거를 딛고 국교를 정상화한지도 어느덧 27년. 세대가 바뀐 그긴 세월동안에도 두나라 국민간의 감정이 국교정상화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이토록 완전히 대립적인 채 남아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일제 36년간의 고통과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27년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본다.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복지와 공통이익을 중시하고….』
이것이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를 선언한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전문 일절이다. 이럴 수가 있을까,과연 그랬던가싶게 역사적 한일조약의 전문은 이렇듯 무미건조하고 담담하며 알맹이없는 내용으로 시종하고 있다.
과거청산에 대한 문구는 단 한마디도 없는 것이다. 누구도 이것을 36년을 노예상태로 지내며 갖은 착취를 당했던 나라가 그 가해자의 나라와 국교를 맺으며 작성한 조약의 전문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마치 아무런 관계나 교류도 없던 두 나라가 국교를 맺으면서 의례적으로 작성한듯한 그런 내용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일본과 맺은 조약의 전문이다.
청구권에 관한 협정도 꼭 마찬가지다. 협정이름부터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라고 돼있어 청구권 협정인지 경제협력 협정인지부터 분간하기어렵게 되어있다. 문맥상으로는 오히려 경제협력 협정이라는 느낌이 앞선다. 아닌게 아니라 실제 내용이 바로 그렇게 되어있다.
청구권 협정이라면 당연히 각종 청구항목이 적시되고 그에대한 지불금액과 방법이 각각 항목에 따라 제시되어 있어야 하건만 전혀 그러한 내용이 없다. 그저 두루뭉수리하게 전체적인 금액과 지불기간 및 방법만을 제시해놓고 있다.
○대의버린 한­일 협정
그러면서도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때마다 강변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두나라 및 그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문제」는 「완전히,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막연하고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한일조약이 「모개흥정」이라고 평가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27년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이렇듯 한국의 거의 일방적인 양보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한제국과 일본간에 맺어진 한일합방조약등 구조약들이 유효인가 무효인가의 문제,한국의 한반도관할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의 문제도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2중적 표현으로 낙착됐다. 확실히 된것은 오직 평화선 폐지뿐이었다.
해서 일본 우파 지식인들의 강변에 분노하고 그 억지주장에 반박하고 나서기에 앞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부터 느껴야 한다. 「명분을 타협하고 실리를 찾자」는 일본의 집요한 설득공작과 배상도,보상도 아닌 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민간차관 3억달러등 8억달러의 현실적 소리에 넘어가 대의와 명분을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모욕을 가져온 씨앗이다.
당시 65년은 바로 을사년 이기도해 한일조약은 제2의 을사조약으로도 불렸다. 이제 한일조약은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버렸으나 민족적 차원에서 볼때 우리들은 불과 한 세대안에 또 한번 일본으로부터 농락당할지도 모를 상황에 처해있다. 북한과 일본간의 수교협상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될 수 있다. 지난 61년 5·16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일본의 안신계 전총리는 한일국교문제에 대해 「다행히 한국엔 군사정권이 들어섰기에 모든 것은 박정희등 소수 지도자의 마음대로 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액수로 박을 만족시키기만 하면 국회도 없고 해서 장애가 없다. 신문이 반대한다하더라도 박의장이 봉쇄해버릴 수 있다」며 기뻐했다.
역시 당시 자민당의 지도자였던 하야일랑도 지전 총리가 자문하자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해있어 매우 절박하게 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유리한 흥정을 할 시기다」며 적극적인 협상을 격려했다. 결과는 바로 그대로였다.
필시 현재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일본은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모든 사정은 여러면에서 27년전 남한의 사정을 꼭 빼어닮았다. 그래선가 북한­일수교회담 북한측 수석대표인 전인철 외교부부부장의 기자회견내용을 보면 일본의 주장이나 협상방식은 한국과의 협상때와 판에 박은듯 똑같다.
○걱정되는 북­일협상
과거청산을 기피하고,사죄는 어디까지나 개인차원에서 말로만하고,배상을 거부하고,증거자료 요구로 시일을 끌고,말을 뒤집고….
북한은 「한일방식」과는 달리 과거청산과 배상원칙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현재는 주장하고 있지만 그 경제적 형편으로 보아 과연 버텨낼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만약 북한마저 한국과 똑같이 굴복해버린다면 그것은 「제3의 을사조약」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정신대문제에 남북이 공동대처를 추진키로 한 것은 옳은 결정이다. 비단 정신대문제뿐아니라 이번 만큼은 과거에 대한 명확한 문서상의 사죄와 그에 따른 배상도 이루어지도록 민족적 차원의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정부가 27년전에 저지른 원죄를 조금이라도 씻는 길이며 일본인들의 방자한 입을 막을 하나의 재갈이 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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