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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기지 대원들 남극 사투] 서로 껴안고 "자면 죽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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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몸을 밀착해 체온을 유지하면서 눈을 뭉쳐 먹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서로 어깨를 흔들며 밤을 새웠다."

남극 세종기지의 연구대원들이 전하는 조난상황은 혹독한 추위와 공포를 이겨낸 인간 승리의 과정이었다.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희망'. 비록 한명이 숨졌지만 끈끈한 동료애로 뭉친 남극 사나이들은 극한상황 속에서도 서로 용기를 북돋우며 침착하게 위기를 벗어났다.

이들은 현재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 중이다. 대원들은 9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하며 숨진 동료 전재규씨를 애도했다.

◇51시간 만의 생환=세종 2호에 탔던 강천윤(39).김정한(27).최남열(37)씨 등 3명은 6일 오후 5시30분(이하 현지시간) 갑자기 몰아닥친 남극의 눈보라 폭풍 때문에 세종기지로 귀환하는 것을 포기하고 중국기지 쪽으로 보트를 돌렸다. 그러나 시계가 줄어든 탓에 방향감각을 잃고 10여시간 이상을 헤매다 7일 새벽에야 넬슨 섬에 가까스로 상륙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얼음동굴부터 찾았다. 눈보라와 추위를 피하는 것이 급했다.

식량은 없었다. 허기를 면하기 위해 주머니에 있는 초콜릿과 초코파이를 조금씩 나눠 먹었다. 갈증은 얼음을 깨 해결했다. 신호음으로 교신하던 무전기의 배터리는 점점 약해졌고, 7일 오후에는 완전히 꺼져버렸다.

이대로 고립돼 죽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추위에 탈진까지 겹쳐 시간이 갈수록 의식이 혼미해져갔다. 그럴수록 리더인 강씨는 "반드시 구조대가 온다"며 대원들을 격려했다. 졸음이 오면 얼굴에 눈을 발랐다.

8일 오전 8시20분. 얼핏 선잠을 청하고 있던 대원들은 '타타타타'하는 헬기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칠레 공군의 구조헬기였다. 모두 동굴에서 뛰어나와 손을 흔들었다. 조난 51시간 만이었다.

◇동료를 잃다=세종 2호 동료들을 구조하기 위해 7일 오후 7시쯤 5명이 고무보트를 타고 기지를 떠났다. 김홍귀(31).정웅식(29).진준(29).황규현(25).전재규(27)씨.

이들은 오후 8시50분쯤 집채만 한 파도를 만났다. 보트는 순식간에 왼쪽으로 뒤집혔고 대원들은 얼음바다 속으로 튕겨 들어갔다. 대장인 金씨는 물속에서 무전기로 조난사실을 기지에 보고했다.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의 이름을 서로 부르며 생사를 확인했다. 보트가 뒤집히는 순간 다들 보트 옆에 묶여 있는 밧줄을 붙잡아 무사했다. 그러나 전재규씨만은 밧줄을 잡지 못한 듯 멀리서 의식을 잃고 뒤로 누운 채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수온은 영하 1도.

진씨는 "물에 빠지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손발을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방수복에 방한스웨터.작업복을 겹겹이 입었지만 파고드는 찬 기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金씨가 "정신차리자"고 소리를 쳤다. 진씨가 의식을 잃은 全씨를 붙잡으려 했지만 파도가 덮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남은 4명은 필사적으로 20여분을 헤엄쳐 알드리 섬에 도착했다. 체감온도 영하 30도. 金씨는 근처에 있는 칠레 하계연구용 컨테이너 쪽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정씨는 "탈수증세를 막으려고 눈을 한 주먹씩 먹었다"며 "체력이 바닥났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컨테이너에 도착한 건 8일 오전 1시쯤. 다행히 간이 가스히터가 있어 눈을 녹여 끓여 먹었다.

무엇보다 급한 것이 체온유지. 모포 두장을 나눠 덮고 서로 몸을 최대한 밀착했지만 추위에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8일 날이 밝자 모두 대피소를 나왔다.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체조를 하고, 뜀박질도 했다. 이어 무전기를 찾아 구조신호를 보내러 바닷가로 갔다. 오전 10시20분. 러시아 구조선이 바다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정신없이 손을 흔들었다. 13시간여의 사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바닷가로 밀려와 있는 全씨의 시신은 러시아 선원에 의해 발견됐다.

엄태민.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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