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김재규 혁명이냐 아니냐에 이견|전 장군 "누가와도 형은 못 살린다"<25면에서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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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군부 이용" 의혹>
79년12월18일 제9차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행해진 최후진술중 이 부분을 옮겨본다.『저의 10월26일 혁명 목적을 말씀드리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셋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넷째가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여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 돈독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한 외교·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 하자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 째로는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영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과 사형구형·집행이 끝난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김재규에게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한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도 수사를 담당했던 합수부 수사관들의 입을 통해서다. 신군부가 사건수사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증좌이기도 하고 단순살인사건이라는 소수의견을 냈다가 후에 법복을 벗은 대법관들(5명)의 정당성이 입증돼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보안사 중령으로 김재규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오일낭씨(현 토지개발공사장사)의 증언.
『김재규가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 보이는 대로 쏘아버린 것 같아요. 적어도 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차 실장과의 관계 등 조직 내에서의 갈등이 근본원인이겠지요. 민주혁명이고 무어고 한 것은 재판과정에서의 도생방책 아니겠습니까. 김재규가 1급 투사라는 것은 추호도 가능성이나 신빙성이 없는 얘깁니다. 군인· 건설부장관·중정부장으로서의 그의 이력과 행동거지를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무능에다 배은망덕까지 경한 사람이지요. 김계원실장은 단순히 김에게 엮여든 인상입니다.』
합수부 수사1국장이던 백동림씨도 같은 견해다. 첫발을 차지철 실장에게 쏜 후 흥분상태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총을 난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후 재판과정에서 혁명운운 한 것은 자기미화에 불과하며, 이 점은 범행 후 육본행이냐 정보 부행이냐로 망설이는 등 김재규의 어설픈 행적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혁명의 절반 성공">
하지만 변호인단의 한 명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이들과 견해가 다르다.
『재판과정에서도 줄곧 국민의 저항권이론으로 맞섰습니다만 단순히 우발적인 범행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유신체제를 생각해 보세요 . 당시는 박대통령 한 사람만 시해한 것으로도 혁명의 절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지요. 나머지 절반은 국민들의 몫이었어요. 김재규 피고가 대통령을「유신의 심장」이라고·표현한 것은 적절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쓰는데 어떻게 우발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국내외 정보를 가장 많이 접하고 어려운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던 김이 나라를 살리려는 심경에서 방아쇠를 당긴 겁니다. 당일 행적이 어설픈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데 당연히 동요와 갈등이 따르겠지요. 실패하긴 했지만 가장 피를 적게 흘린 혁명방법이라고 할 만하지요.』
강변호사는 김재규에 대해『사나이다운 일을 하고 상당히 떳떳하게 죽어갔다』고 평하면서도『사무라이 기질이랄까 약간의 과대망상증이랄까 여하튼 지사풍을 동경하는 독특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대해서는『혁명에 관한 김재규의 아이디어를 거꾸로 채용해 써먹은 의심도 간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김재규씨 일가는 요즘 굳게 입을 닫고 있다. 그의 동생 항규씨는 혜운이라는 법명으로 아예 불가에 귀의해버렸다. 항규씨는 10·26후 합수부에 연행돼 모진 조사를 받고 재산을「헌납」했다. 풀려날 때 전두환 합수부장이 찾아와『미안하다. 그러나 카터가 와도, 브레즈네프가 와도 형은 살릴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항규씨는 89년 재산을 되찾으려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으나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 당했다. 김재규씨의 부인 김영희씨(61)도 남편이 10·26후 강압에 의해 헌납한 땅을 돌려달라는 소유권이전등기 말소소송을 냈으나 역시 지난 1월 입증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10·26사건 후 해가 바뀌어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80년8월27일)된지 두달 후인 80년 10월26일 동작동 국립 묘지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전직 청와대 비서실·경호실 출신 인사들이 경찰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너희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온 줄 알아? 왜 마이크까지 못쓰게 하는 거야.』

<소송 모조리 패소>
지금은 박대통령 추모단체인 민족중흥회를 드나들며 소일하는 전직경호원 P씨가 설명한 소동의 전말.
『세상이 바뀌니까 인심도 싹 바뀌더군요. 그게 권력인가 봐요. 고인의 1주년추모식을 하려고 옛 동료들에게 안내장을 돌렸는데 그게 거의 배달되지 않았어요. 추모식장에 절대 마이크를 갖고 가지 말라 길래 몇몇이 청와대에 가서「정 그러면 우리가 청와대 앞에서 데모라도 하겠다」고 막 나갔더니 대신 볼륨을 최대한 낮추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정작 당일에는 경찰들이 나와서 행사를 방해하고… 언제는 설설 기던 사람들이 말이에요.』
거의 절대적으로 보였던「유신권력」은 그렇게 허망스럽게 사라졌다. <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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