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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식 철도청 건설과장(앞서 뛰는 사람들: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남북철도 올핸 뚫릴겁니다”/경의선복구 10년집념 “준비 끝났다”/우리쪽 구간 12㎞… 공기 6개월예상
서울에서 개성·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4백99.3㎞의 경의선.
그 초입에 잘라나간 북녘 8㎞(봉동∼장서) 남녘 12㎞(장서∼문산) 모두 20㎞의 철길을 잇는 일은 동강난 국토,갈라진 민족의 힘줄을 붙들어 매고 혈맥을 통하게 하는 큰 역사다.
경의선 철도복구의 실무책임자인 유호식 철도청건설과장(54).
『올해는 뚫릴겁니다. 남북관계에서도 이제 가시적인 결과가 나올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경제교류가 본격화되면 철도부터 복구돼야지요.』
그가 책임을 맡아온 남북철도복구는 이미 착공준비를 다 마쳤다.
85년 1월22일∼3월20일 복구구간 실시 설계,86년 6월 시공업체로 선정된 경향건설과의 일괄계약,86년 10월14일∼87년 7월12일 임진강교량 하부보강작업등 준비가 마무리된 상태다.
『우리쪽 구간이 4㎞쯤 길지만 일단 남북이 동시에 복구작업을 시작하면 북쪽보다 하루라도 먼저 완공할겁니다. 공사기간은 대략 6개월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새로 잇는 남북철도는 본래의 노선을 약간 우회하게 된다. 통일로건설때 경의선부지의 30%쯤이 도로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철도청은 지난해 대체부지로 사유지 7천6백평을 매입했다.
남북종단철도는 모두 4개 노선. 1차 복구대상은 경의선이지만 경원선도 지난해 실시설계를 마쳤고 금강산선 또한 예비조사를 끝냈다. 강릉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원산으로 이어지는 동해북부선만 아직 손을 못대고 있다.
남북철도복구사업이 숙명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유씨가 경의선 복구업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82년 가을. 전두환 전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대북한 20개 시범사업검토당시 철도청 건설계장으로 업무를 맡았다.
그후 85년 제4차 남북경제회담을 계기로 경의선복구가 본격 거론되면서 유과장은 실시설계를 비롯,실무후속조치를 챙겼다.
『기획총괄을 맡고 있어 현장을 챙길 필요는 크게 없지만 철도인으로서 저에게 주어진 필생의 역사라는 무거움때문에 현장을 수없이 다녀왔어요. 눈을 감고도 구비구비 약도를 그릴 정도니까요. 충분치는 않지만 북쪽 철도에 대한 정보도 가능한한 모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세라도 개통될듯 했던 경의선은 남북관계의 변덕속에 진척없이 세인들의 기억 뒤편으로 숨어들었고 유과장은 85년 12월 용산철도건설창 토목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90년 3월 본청건설과장으로 복귀하자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남북총리회담에서 철도복구에 대한 기본원칙이 합의됐고 유과장은 작업 총괄책임을 맡게됐다.
『제 고향이 함북청진이에요. 국교 2학년때인 46년 형만 남겨두고 가족들이 38선을 넘었습니다. 당시만해도 38선 두정거장 전까지 경원선을 탔는데… .』
58년 철도고교를 졸업한뒤 선로보수원으로 철도에 투신,34년간의 공무원생활중 꼭 10년간을 남북철도와 씨름해온 유씨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개성·평양·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벌판을 달리는 꿈을 이따금 꾼다』고 했다.<문산=엄주혁기자>
▷경의선◁
경의선은 1904년 로일전쟁에서 일제가 군사보급의 필요에 따라 신의주∼용산간 군용철도를 계획,1905년 개통됐다.
1908년에는 부산∼신의주간에 급행열차인 융희호가 운행,명실공히 남북종단 철도가 됐다. 1937년 복선화에 착공,1943년 완공됐으나 남북이 분단되면서 여객수송은 45년 4월1일중단됐다.
6·25당시 남한이 평양을 탈환했을때 서울에서 대동강까지 개통되기도 했으나 1950년 12월14일 평양에서 떠난 월남민열차를 끝으로 열차운행이 중단됐고 임진강철교 폭파로 철로도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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