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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투쟁자제 합당전력 다짐(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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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3/“극좌노선은 미군정에 빌미 제공”/박,월북으로 2인자 전락/북,김일성시대 본격 개막
박헌영의 최종월북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주의자 대공산주의자의 싸움이 마무리됨을 의미했다. 남쪽은 민족주의세력이 미군정의 후원속에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세력은 소련군정이 장악하고 있는 북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박의 월북은 바로 남쪽을 세력기반으로 했던 박헌영 시대의 퇴조와 김일성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박헌영이 1인자가 될 수 없음은 해방후 1년반여에 걸친 장정의 과정에서 이미 예고됐지만 박헌영 스스로가 오랜 활동무대를 등져야했고 김일성의 무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권력갈등이 김일성의 승리로 끝났음을 함축하고 있었다.
서울을 뒤로했다는 것은 누가봐도 박헌영의 패배였다.
실제로 박은 그 이후 줄곧 북에 머물려 숙청될 때까지 2인자로만 만족해야 했었다.
그의 월북과 동시에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중심지는 평양으로 바뀌었다.
서울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던 역사의 무게를 통해 스스로를 세웠던 조선공산당의 권위는 박헌영의 월북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부스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변화는 박헌영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여러차례에 걸친 평양방문기간중 북한지도부가 제기했던 박헌영에 대한 서슴없는 비판을 통해 「더이상 1인자가 아닌」 박헌영의 위상은 드러났지만 최종월북을 위한 6차 평양방문에서의 박에 대한 비판은 좀더 강화됐다.
46년 10월11일 평양에 도착한 박헌영은 소군정 인사와 김두봉·김책 등 북로당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개인적인 의견교환을 하는 정도에 그쳤고 북로당 지도부와의 회의는 5일뒤인 15일께에 가서야 열렸다.
현안에 대한 긴급토론 형식으로 진행됐던 그간의 평양방문과는 어딘가 달랐다.
당시 남한이 폭동으로 얼룩져가고 합당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던 긴박한 정세였음에 비추어 볼때 북로당의 「느긋한」 태도는 박헌영과 그가 수행하고 있는 남한의 10월사태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북로당 당사에서 열린 15일의 회의에는 박헌영과 김일성·김두봉·김책·허가이·최창익·박일우·주영하·박정애 등 북로당 중앙위원이 참석했다. 회의주제는 남한의 10월사태 및 3당합당이었다.
먼저 10월사태에 대한 박헌영의 보고부터 시작됐다.
전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는 회의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박헌영은 10월 투쟁이 대단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공만하면 미군정이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투쟁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도 요구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반탁측이 실력행사를 하지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합당반대파들을 위축시켜 합당을 촉진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투쟁이 성공하면 미군정이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같은 형태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합당문제에 대해 박헌영은 「오염분자」(「신속한 합당」 반대파,92년 1월20일 33회 참조)들 때문에 합당이 지연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좌우합작을 주도하는 여운형,김규식이 조선공산당이 제시한 원칙을 접수하지 않아 합당이 제대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박헌영의 생각은 5차회동이후 일관된 것이었지만 북로당 지도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북로당지도부는 미군정과의 지나친 대립이 남한에서 좌익탄압의 빌미만 제공할뿐 아니라 잘못하면 좌익의 근거를 빼앗갈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 소비에트화 성공에 이어 한반도 공산정권 창출을 목표로 하는 북로당 지도부가 볼때 박헌영 노선은 위험스럽고 성급한 것이었다.
박헌영의 보고를 들은 회의참석자들의 표정은 그런 분위기를 반영했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박헌영의 보고는 합당지연에 자신의 책임은 없고 모험적인 군중노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두 좌경노선을 걱정하는 얼굴이 됐습니다.
걱정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박의 노선이 얼핏봐도 너무 모험적인데다 9월말께 평양을 방문했던 여운형의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운형은 1주일 가량 평양에 머물면서 김일성에게 「파업과 같은 폭력노선 때문에 걱정」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평가해 손을 잡고 있던 여운형도 혁명적 방식보다는 대화나 협상등을 통한 정치적 개혁을 강조하고 있는 마당에 박이 모험노선에 경도되어 있으니 위험을 불러들일까봐 걱정되지 않을수 없었던 겁니다.』
박헌영노선에 대한 비판은 최창익부터 시작했다.
공작원들의 정보만으로 남한정세를 파악하던 다른 사람과 달리 최창익은 합당지원을 위해 서울에 열흘정도 머물면서 남쪽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의 논리를 그대로 수긍할 수 없었다.
서씨의 증언.
『최창익은 「남조선합당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하면서 박헌영에게 대놓고 비난하다시피 했습니다.
군중투쟁을 한다고 미군정이 순순히 양보할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총파업을 앞당긴 것은 조선공산당내 반박헌영계열의 9월말 당대회 소집계획을 파탄시키려는 음모가 아니냐고 따졌어요. 최창익은 또 박헌영이 여운형·백남운과 직접적인 합의는 하려하지 않고 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 박아뒀던 프락치나 이용해 일방적으로 합당하려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박헌영이 지난 7월 평양에 왔을때(5차회동)는 분명히 3당지도부의 완전합의에 의한 합당을 합의해놓고 왜 여운형과 백남운이 모르게 프락치들을 조종해 상대방을 흔드는 합당방식을 택하려고 했는가고 물었습니다. 최창익은 서울에는 그런 얘기가 파다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많은 사상자를 낼 정도로 폭력적 군중투쟁을 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박헌영은 「북로당 동지들이 조선공산당 당내사정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만 대꾸했습니다.』
회의기록에 따르면 이날 모임은 4시간반 정도 진행됐지만 박헌영의 보고뒤에 박일우,주영하,김책 등이 잇따라 나서 박을 비판하는 바람에 회의가 길어졌다.
김일성은 마지막 순서쯤에 가서 결론 비슷하게 의견을 말했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은 토의가 끝날 때쯤 「파업이든 폭동이든 군중이 투쟁에 나섰다면 일단 인정해야 하고 지지를 보내야 한다. 그러나 당의 지도노선이 극좌로 흐르는 것은 분명히 경계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민의 파업투쟁이나 인민항쟁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되지만 당의 전술같은 문제들은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파업은 지지하지만 조선공산당의 노선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박헌영 주장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김일성은 그러나 합당문제는 박헌영을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일성이 박헌영을 두둔해주긴 했지만 이날 회의는 전체적으로 박헌영을 비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날 오후 박헌영과 김일성은 요담형식의 개별회담을 가졌다.
이자리에서 박헌영에게 북한체류가 거듭 확인됐다.
서씨의 증언.
『박­김의 별도회담에서 10월사태를 더이상 확산시키지 않고 합당사업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빠른 시일내에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와 북로당 정치위원의 합동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방법들을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뒤 김일성은 합당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도 박헌영이 평양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습니다.
박헌영은 머무르는데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일단 남의로 갔다 돌아와야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합의를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박헌영이 워낙 한번은 갔다와야겠다고 해서 일단 개성에 내려가 며칠간 머물면서 남쪽의 공산당상황을 검토하고 올라오기로 했죠.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경호원을 제공했습니다.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개성에서 1주일정도 머물면서 이승엽·김삼룡 등과 접촉한뒤 10월말께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박헌영이 최종적으로 평양에 올라온 뒤 곧 서울의 좌익계 지도자들이 평양을 방문해 남북공산당 및 좌익계지도자들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해방이후 처음 열리는 남북 좌익계 전원회의였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차장
안희창기자
유영구기자
안성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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