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과학칼럼

빛을 천천히 가게 할 수 있나요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정말 빛의 속도를 줄일 수 있을까. 우선 빛의 속도에 대해 알아보자. 빛은 진공 중에서 1초에 30만㎞를 날아간다. 이를 광속(光速)이라고 한다. 공기나 물속에서는 어떨까. 공기 중에서는 진공에서와 거의 같다. 물속에서는 공기 중에서보다 1.3배 느린 22만㎞를 1초에 간다. 광속과 물질 속에서의 빛의 속도의 비를 그 물질의 굴절률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빛은 통과 물질의 굴절률에 따라 다른 속도로 달린다. 예를 들어 태양 빛이 굴절률 1.5인 유리창을 통해 실내로 들어올 때 빛은 광속으로 날아오다가 유리창에서는 1.5배 느려지고 다시 공기 중으로 나와 광속으로 날아간다. 굴절률 3인 투명물질의 경우 빛의 속도를 세 배 정도 느리게 할 수 있지만 1초에 10만㎞면 여전히 빠른 속도다. 그럼 빛의 속도를 나무늘보가 움직이는 것처럼 더욱 느리게 할 수도 있을까.

미국 하버드대의 리네 하우 교수는 빛의 속도를 자동차 속도인 시속 60㎞로 줄일 수 있음을 1999년 2월 18일자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하우 교수는 일정 시간만 반짝이는 펄스 빛의 속도는 그 빛이 통과할 때 물질의 굴절률 변화가 커질수록 느려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원자가 빛을 강하게 흡수하는 현상을 흡수공명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공명이 일어나면 원자의 굴절률 변화는 매우 커진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빛에 대해 흡수공명이 일어나는 원자들도 있다. 이런 원자의 경우 공명이 일어나는 첫 번째 빛을 원자에 조사(照射)하면 그 원자의 성질이 달라져서 두 번째 빛에 대한 공명특성도 다르게 된다. 어떤 특수조건에서는 두 번째 공명 빛이 흡수되지 않고 투과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을 학술적으로 '전자기적유도투과(EIT)'라고 한다. 이 현상이 일어날 때는 공명특성 변화로 인해 원자기체의 굴절률도 크게 변한다. 하우 교수는 EIT 현상을 이용해 차가운 원자기체를 투과하는 빛의 속도를 광속의 5000분의 1 정도로 줄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 이용하면 심지어 빛을 원자기체 내에 가둘 수도 있다고 한다. 빛의 속도는 생체분자를 이용해서도 줄일 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대의 디 라오 박사팀은 2005년 12월 16일자 저명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에 두 빛에서 흡수공명이 일어나는 박테리오돕신 생체분자를 이용해 굼벵이보다 더 느린 초속 0.1㎜의 빛을 만들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빛을 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지연시키거나 잠시 저장할 수도 있게 됐다. 미국 IBM의 유리 브라초브 박사는 2006년 12월 22일자 네이처 포토닉스에 빛을 지연시키거나 혹은 저장하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이 장치는 빛이 지나가는 마이크론 크기의 실리콘 막대 옆에 반지 모양의 실리콘 공진기들이 나열되어 있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빛을 실리콘 막대로 보내면 막대를 따라 곧바로 가지 않고 반지 공진기에서 여러 번 회전하게 되어 빛의 흐름이 지연된다. 이 지연되는 시간 동안 빛의 정보가 고리 공진기에 보관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면 대량 정보 전송을 할 때 전기신호 대신 광신호로 대체 사용함으로써 전기신호에 비해 보다 많은 정보를 더욱 빠르게 보낼 수 있다. 하나의 실리콘 칩에 수백 개의 광 저장장치가 집적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전자신호를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컴퓨터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난 광신호를 이용하는 광 컴퓨터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이 같은 기술들은 광 컴퓨터 외에도 미래 광통신의 주역이 될 양자통신(量子通信), 초고속 대용량 정보처리, 차세대 디스플레이, 광양자 컴퓨팅 등에도 응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순진한 초등학생의 엉뚱해 보이는 호기심은 지금 세계 유명 과학자들의 창의적 연구로 인해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이종민 광주과학기술원 고등광기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