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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러 벌이라면 물불 안가린다-베트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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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동남아가 꿈틀대고 있다. 태국·말레이시아 등을 선두로 한 동남아 각국은 빠른 속도로 한국의 수출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의 경제 개발 성과를 바탕으로 야심찬 성장 전략을 마련, 21세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도이모이 (쇄신) 정책을 통해 시장 경제 체제를 도입하는 등 인도차이나 반도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으며 보 반 키엣 베트남 총리가 ASEAN (동남아국가연합) 가입을 요청하는 등 이 지역 전체가 지각 변동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외국 투자에 힘입은 동남아 경제 성장의 뒷면에는 일본 경제에 대한 의존도의 심화, 사회 간접 자본의 정체 등 얼룩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일본은 글로벌 전략에 따라 동남아를 생산 기지화 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한편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최근 동남아에서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는 아시아의 경제 블록화 논의 역시 일본을 중심 축으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 경제의 선진화·국제화를 위해서는 사양 산업을 움켜쥐고 있기보다 해외 투자를 더욱 늘려 생산 기지를 확보하는 한편, 기술 혁신과 고부가가치 제품의 개발을 서둘러 헌물을 쏟아버리는 만큼 새물을 담는 노력이 절실해지고 있다.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의 현지 취재를 통해 이들 국가의 성장 전략과 경제 발전에 따른 명암을 알아보고 북방 정책 못지 않게 중시돼야 할 우리 경제의 남방 전략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지난 75년 월남 패망 때 사이공 (현 호치민시)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탄 손 낫 공항은 투자 박람회장이 돼버린 베트남에 들어가려는 사업가·관광객들로 붐비고있다.
탄 손 낫 공항은 하루 6∼7대의 여객기가 뜨고 내리는데도 공항청사가 비좁아 개수 공사가 한창이다.
공항청사가 흡사 낡은 창고같이 우중충한 모습이지만 직원들이 승객을 대하는 태도는 이곳이 지구상에 몇 안남은 사회주의 국가인가 하는 의문이 들 만큼 부드럽다.
베트남의 체제는 사회주의이지만 이 나라 경제의 중심지인 호치민 시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자본주의 원칙에 충실하다. 공항안 손수레 (카트)에는 삼성전자와 골드스타의 로고가 선명하며 공항 입구에는 세계 다국적 기업들의 광고가 줄지어 서있다.

<교육열도 높아>
공항 밖에서는 택시와 시클로 (세발 자전거) 운전기사들이 경쟁적으로 손님을 부르며 호치민 시내에는 하루가 다르게 상점이 늘고 있다. 나이트클럽·가라오케도 성업중이다.
베트남 농민들은 수확량의 20%만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토지 사유권이 인정되고 직업의 선택도 거의 자유롭다. 다만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이 없는 게 베트남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
호치민 대학의 퀘엔 레 교수는 『한달에 6만9천동 (약 6달러, DONG은 베트남 화폐 단위)의 월급을 받고 있다』며 『우리는 무척 가난하다』고 말했다.
퀘엔 교수는 또 『학생들이 졸업한 후 취업이 쉽지 않은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베트남의 성장 잠재력은 무한하다는게 현지 진출 업체들의 공통된 평가다. 89년 호치민에 가 방림 가공 공장을 차린 효동 기업의 이진섭 지사장은 『베트남인들은 근면하고 손재주가 뛰어나 우리 나라 근로자보다 질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며 『동남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자질이 우수하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백 달러가 채 안되며 인구수가 6천7백만명에 이른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20%이지만 인구의 절반 가량이 실질적인 실업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교육열이 높아 문자 해득률이 90%에 이르고있다.
정부가 외국 투자 업체에 정한 최저 임금은 한달 50달러. 그러나 실제로는 20∼30달러에도 고용이 가능하다.
미국의 엠바고 (금수 조치)와 사회주의 체제가 갖는 관료주의 등 베트남 진출에는 아직 많은 제약이 있지만 서방 기업의 베트남 투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외국 기업의 대베트남 투자는 작년 9월말 현재 3백14건 24억4천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투자 1위국은 5억4천만 달러의 대만, 다음으로 홍콩 (3억5천만 달러), 호주 (2억8천만 달러) 등의 순이다.
한국은 4천2백만 달러로 12위, 일본은 미국 엠바고의 영향으로 9위(1억 달러)에 머물러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일본은 그러나 대미 관계가 개선되면 즉시 베트남에 진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으며 교역은 이미 베트남 전체의 30%를 차지할 만큼 활발하다.
베트남의 또 다는 매력은 천연자원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도안 녹 봉 베트남 상공회의소 회장은 『베트남의 원유 매장량은 42억t, 석탄 35억t, 보크사이트 30억t, 철광석 매장량은 7억t에 이른다』고 밝혔다.

<외국인엔 바가지>
베트남의 이점을 노린 외국 기업의 진출은 작년 말부터 봇물을 이루고 있다. 12월 한달 동안 24개의 무역 사절단이 베트남을 다녀갔으며 미국 상공회의소는 75년 이후 처음으로 12월초 베트남을 공식 방문,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미국계 시티은행이 l2월부터 베트남에서 환전 업무를 시작했고 프랑스·일본 등은 대규모의 경협 자금 제공을 검토중이다.
한국 기업은 삼성·현대 등 10개 회사가 베트남 정부로부터 지사설치 허가를 받는 등 60∼70여개 업체가 진출했다.
베트남은 소련 연방 체제의 붕괴에 따라 사회주의 고수 방침을 밝히고 있으나 도이모이와 시장 경제의 도입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다.
보 반 키엣 베트남 총리는 12월11일부터 26일까지 계속된 제8기 10차 정기 국회에서 『외국 투자 유치를 위한 정책과 제도를 개선하는데 최우선을 둬야한다』고 말하고 『과거에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돼온 국영기업들도 이제는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베트남 정부는 최근 인도네시아와 처음으로 민간 은행을 합작 설립했으며 증권 시장의 개설을 추진중이다.
베트남은 또 외환 자유화를 강하게 밀고 나가고 있다.
외환부족 때문에 외화의 유출을 억제하고는 있으나 공식 환율과 암달러 시세는 거의 차이가 없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공식 환율은 달러 당 1만2천∼1만2천6백 동이었던데 비해 암달러는 1만3천동대에서 움직였으며 한때 공식 환율을 밑돌기도 했다.
베트남은 경제 개발에 필요한 달러화를 모으기 위해 게걸스러울 만큼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끊긴 데다 동구 국가들로부터 경화 결제를 요구받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는 여행자에게 달러화를 동으로 바꿔주지만 동을 달러로는 갈 바꿔주지 않는다. 일단 환전한 돈은 모두 국내에서 쓰도록 하는 것이다.
하노이∼호치민간 항공요금은 내국인에게 90달러를 받지만 외국인은 3백 달러를 내야한다.
다른 나라의 호텔에서 고객에게 무료로 서비스하는 항공표의 예약 확인 업무도 좌석 당 1∼5달러씩 꼬박꼬박 받고 있다.
모든 입국자는 48시간 이내에 경찰에 등록하도록 돼있지만 사전에 이를 가르쳐주지 않으며 미 등록자에 대해서는 출국 때 법규정 위반을 이유로 80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있다.
베트남 주재 종합 상사의 한 관계자는 이같은 사정을 『베트남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돈을 내야한다』고 표현했다.
시클로 운전기사 둑 드리씨는 『호치민에는 베트남 사람끼리 사고 파는 가격과 다른 차별적인 외국인 가격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민간 기업 설립>
베트남이 시장 경제로 전환하고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민간 기업의 설립이다. 도이모이 이후 호치민에는 2백20여개의 민간 기업이 설립돼 있다.
농산물·의류·건설·냉동 분야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이들 민간 기업이야말로 베트남 경제의 「새싹」인 것이다. 이들 업체의 절반은 비교적 사업을 잘 꾸려가고 있으나 나머지는 자금 부족과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베트남은 외국 기업의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 이미 경제 특구 제도를 도입했다.
호치민시는 90년9월 국무회의에서 수출 공업 단지 건설이 승인된 이후 처음으로 사이공 수출가공구 (SEPZONE)를 건설중이다.
사이공 수출가공구는 모두 18만평으로 이중 3만평을 오는 3월까지 1차로 개발하고 나머지는 94년까지 공단 조성을 끝마칠 계획이다. 베트남은 사이공가공구의 개발이 순조롭게 끝나면 카트라이촌 30만평을 특구로 조성키로 돼있다.
베트남은 정치·외교적으로도 전환기를 맞고 있다.
베트남은 엠바고의 해제를 위해 미국과의 막후 협상을 계속중이다.
베트남은 또 키엣 총리가 90년 말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나 베트남의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가입을 요청한 이후 여러 차례 가입 의지를 밝히고 있다. 베트남의 아세안가입이 이뤄지면 동남아에서 인도차이나반도 3개국과 아세안의 대립구도가 종식돼 이 지역의 평화가 정착되는 것은 물론 베트남이 동남아 지역의 강자로 떠오를 전망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가장 많은 1백15만명의 군대를 보유, 태국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다.
도안 녹 봉 베트남 상의 회장은 『베트남은 지난 30여 년간 전쟁을 차러왔고 이제는 모든 국민이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아직 국민의 생활은 어렵지만 도이모이의 결과 연간 4백%에 달했던 인플레가 89년 이후 35∼40%로 낮아지는 등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은 아직까지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도층이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고 풍부한 인력과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앞으로 가장 역동적인 시장으로 떠오를 전망이며 이에 따른 우리 나라의 진출 전략 마련이 시급해지고 있다.
호치민시=글 길진현·사진 장남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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