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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로키' 보고 대구 찍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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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구시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한다면 아마 80% 이상은 박정기 국제육상연맹(IAAF) 집행이사(72.전 대한육상연맹 회장.사진) 덕분일 겁니다."

국제육상연맹 실사단이 대구를 찾았던 지난 달 22일, 실사단원 몇몇이 박 이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IAAF 내에서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두고 한 말이었다.

박 이사의 영향력은 대구유치단이 케냐 몸바사를 찾은 22일 이후 진면목을 발휘했다.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 대구시가 가장 유리한 순서인 마지막 번호를 받은 것은 박 이사의 보이지 않는 입김 덕분이었다고 한다.

국제육상경기연맹 집행이사회가 열린 케냐 몸바사 현지에서 연맹 간부들은 "IAAF 회장은 세네갈 출신의 라민 디악이지만, 직함 없는 회장은 '박정기'"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의 영향력과 활동 반경을 짐작케 하는 말이었다.

박 이사는 1991년 이후 임기 4년의 집행이사를 네 번째 연임하고 있다. 28명의 집행이사 가운데 여섯 번째로 장수하고 있다.

연맹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헬무트 디겔(독일) 부회장, 로베르트 게스타 드 멜로(브라질) 이사, 세자르 모레노 브라보(멕시코) 이사, 류다펭(중국) 부회장과의 친분은 형제 이상이라고 한다.

박 이사는 유치가 결정된 직후 가슴을 쓸어 내렸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료가 막상 투표장에서 눈길을 외면하는 거예요. 이거 큰일났다 싶더라구."

하지만 뚜껑을 열고 나서 그런 생각이 잘못됐음을 곧바로 깨달았다고 했다.

"역시 의리있는 친구들이더군요. 너무 긴장해서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던 거죠.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인 표 차로 대구가 결정됐다는 말을 집행부 핵심 인사로부터 들었습니다."

27일 밤(현지 시간) 본부 숙소인 몸바사 화이트샌즈호텔에서 열린 유치 축하연에는 박 이사의 친위 멤버들이 대거 참석했다. 10여 명의 연맹 집행이사들이 '로키 박'(국제 육상계에서 그의 애칭)을 연호하며 대회의 대구 유치를 축하했다. 일부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로키를 보고 대구를 찍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러시아가 집행이사를 보유했다면 2011년 대구 유치는 힘들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박 이사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까지 대회 유치에 나서는 것을 보고 스포츠 외교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꾸준하게 국제회의와 대회에 참가하고 체육계 유력인사들과 안면을 익히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구의 강점은 대회 운영능력과 시민들의 열기, 스포츠 시장으로서의 잠재성"이라며 "한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이고 삼성.현대같은 기업이 있다는 것이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유치 배경을 설명했다. 나라 살림이 어려워 국적 기업이 아닌 외국 기업의 후원을 받는 처지였다면 대회 유치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이사는 마지막으로 "대구시의 승리는 유종하 유치위원장과 김범일 시장, 그리고 시민들이 이뤄낸 쾌거"라고 유치의 공을 주변 인사들에게 돌렸다.

대구 출신인 박 이사는 육사 출신(14기)이다. 하나회 출신인 그는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군문을 떠났다.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82년 한국중공업 사장, 83~87년 한국전력 사장을 지냈다. 85부터 96년까지 11년 동안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2000년 아시아육상연맹 종신부회장에 선출된 육상인이다.

케냐 몸바사=신동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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