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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손학규는 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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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나라당이 잘나가는 시기여서 더 이상 자기 개혁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떠나지 않을 겁니까.

"내가 왜 탈당합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대선 후보가 되지 않아도 한나라당을 지키겠다는 건가요.

"(목소리를 높이며) 나는 정치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치 그만둡니다."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그는 말을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 "죽음의 길인 줄 알고 있다"면서 말이다.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킨 YS가 이명박씨 손을 들어준 데 충격을 받았다" "경기도지사 시절 밀어주고 키워준 의원들이 '빅2'에 줄 서는 걸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 "DJ와 묵계가 있었다"는 등의 다양한 분석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야말로 작은 변수에 불과하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대선 주자 반열에 올라선 정치인이 '세상 인심은 본래 강자에게 기우는 것'임을 모를 리 없다. 근본적 이유는 따로 있다.

손 전 지사는 2007년 대선에서 승부를 보려 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당 대표나 국무총리를 하고 2012년 대선에 출마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가 권력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에 남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뛴다 해도 그는 결코 차기 권력의 핵심에 설 수 없다. 대통령 당선자와 그 세력에게 있어서 대선이 끝난 뒤의 손씨는 철저한 견제의 대상일 뿐이다. 총리나 당 대표를 한 번쯤 맡기는 하겠지만 실권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코 이너 서클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권력은 '대주주 독식(獨食) 게임'이기에 그렇다. 손씨가 대통령의 꿈이 있다면, 총리나 당 대표 한 번 하는 걸로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면 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권력투쟁의 측면에서의 이해일 뿐이다. 그게 그의 잘못마저 덮어주지는 않는다. 그는 탈당하지 않는다는 수차례의 약속을 저버렸다.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었던 신뢰도를 깨뜨린 것이다. 또 자신을 14년간 키워준 샘물에 침을 뱉고 떠난 행위는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것이다. "수구 보수"라느니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 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느니 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와 한나라당은 채무관계가 없어졌다. 아무리 탈당에 명분이 필요했다 해도 "한나라당의 변화를 모색했지만 내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는 정도에서 그쳤어야 했다. 이런 거부감과 거리감 때문에 탈당 기자회견장에서의 그의 눈물이 뜬금없는 것으로 비친 것이다.

그의 최선의 선택은 한나라당 내에서의 '순교'였다. 경선에 끝까지 참여하고, 그 후엔 대선 후보에게 계속 변화와 개혁을 주문해야 했다.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할 경우 정권과 거리를 둔 채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12년에 기회가 오면 나서고, 그렇지 않으면 정치를 접으면 그뿐이다. 이게 자신이 14년 전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을 선택한 데 대해 책임을 지는 길이었다. 그랬다면 경선에 승복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목말라 하는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고, 그가 비판한 한나라당의 '수구화'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었다.

이제 차선의 길만 남았다. 그가 말한 대로 '무능한 좌파'와 '부패한 우파'를 넘어선 새 정치세력 형성의 불쏘시개나 치어리더가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본인이 이번 대선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의 진정성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신용이 떨어졌으니 그 말도 의심받겠지만 그건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