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야화(26)|도강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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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51년1월 서울에 들어왔던 중공군과 괴뢰군은 천안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후퇴했다. 전투와 함께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언제 어떻게될지 모르므로 정부는 그냥 부산에 있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대학들은 부산에 가건물을 지어놓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중앙대학은 대신동에다 바락을 지어놓고 새로 강사를 채용해 강의를 해나갔다. 그때 모인 사람이 윤태림·고형곤·이혜구, 그리고 나, 네사람이었다. 김태오는 부총장으로 총장을 대행하고 있었다.
그때 서울에는 전시연합대학이 생겨 성균관대학 교수이던 임경일이 책임자로 앉고 교사는 성균관대학을 이용하였다. 나는 신문사 일이 바쁘지 않았으므로 중앙대학 외에 이화대학에도 출강했다. 이화대학은 독일어교수 이해창의 추천으로 강의를 맡았다. 유명한 김옥길이 경리를 맡고 있어서 돈가방을 가지고 다니며 서툰 솜씨로 돈을 세어 우리들의 강사료를 주었다.
조금 있다가 임영신총장의 알선으로 서울 흑석동 중앙대학 근처에서 서울분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고 싶어하는 나를 서울분교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학교는 한강이남에 있었으므로 부산에서 노량진까지는 쉽게 왕래할수 있었지만 서울에는 마음대로 못들어갔다. 아직도 북쪽에서 전투가 진행중에 있었으므로 유엔군측은 서울에 사람을 넣는 것을 극도로 억제하였다. 부산에 피난해 있던 사람이 서울에 들어오려면 부산에 있는 유엔군 민사처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았다. 장사치들이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허가하지 않았다. 나도 노량진까지는 왔지만 서울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다행히 영국 성공회총무 임영빈의 주선으로 도강증을 얻을수 있어서 1952년 추석에 가족 모두가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강 건너 노량진에 있는 중앙대에 나갈수는 있었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올수가 없었다. 미군헌병이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사람은 무조건 군트럭에 태워 강을 건네다주지만 한강 남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은 다리목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도강증을 일일이 검사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시골에 다녀오려면 반도호텔에 있는 미군서울지구 사령부에서 발행하는 도강증을 가져야 했다.
이 도강증은 많은 비극을 빚어내서 이 때문에 적지않은 사람이 죽었다. 피난민들은 어떻게 해서 한강남쪽까지는 왔지만 도강증이 없어 서울에 못 들어왔다.
강가에서 방황하다가 날은 춥고 돈은 떨어져 강언덕에서 얼어 죽은피난민들의 시체를 나는 보았다. 이 악마같은 도강증은 정부가 정식으로 환도할 때까지 계속 많은 선량한 백성을 울렸다.
나는 다행히 미군 서울지구 사령부에 근무하고 있는 오랜 친구 한길수를 만나 도강증을 얻어 한주일에 네번 한강 건너 중앙대학에 출강할 수 있었다. 강 건너에 사는 학생들을 모아 2개반을 만들어 가르치는 외에도 임경일의 간청으로 성균관대학에 있는 전시연합대학에도 출강하였다. 서울신문이 일찍 환도해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으므로 한주일에 두번 사설을 써보냈다.
중앙대학에서는 서울분교로 2주일에 한번씩 선생을 번갈아 보내 강의를 시켰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도강증을 알선해주어 오래간만에 서울구경을 하게 하였다.
서울은 일선지구이기 때문에 사람은 군인들뿐이고, 차는 지프밖에 없었다. 나도 이들 틈에 끼기 위해 군복을 입고 지프를 타고 다녔다.
우리가 환도했을 때의 서울은 문자 그대로 폐허였다. 큰길에는 폭격으로 무너진 집들이 늘어섰고, 대낮에도 종로에 행인이 드물었다.
동대문 시장이나 대폿집에는 어디에서 나온 사람들인지 남녀들이 들끓었으나 모두 그동안 굶주려 얼굴이 창백하고, 뼈만 앙상하였다.
동대문시장 넓은 터에는 부잣집에서 꺼내온 값진 물건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값비싼 서화·골동품·의복·세간등을 쌓아놓고 손님을 불렀지만 주머니들이 비어있는 시민들이라 흥정하는 사람이 없었다.<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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